가짜 초음파 세척기와 매너 좋은 판매자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9/26


몇 주 전에는 전기 면도기들을 주웠다. 내가 써놓고도 정신나간 소리 같은데, 누군가가 재활용 쓰레기 배출일에 전기 면도기 세 개를 봉지에 담아서 내놓은 것도 사실이고, 그것을 보고 내가 번민 끝에 주워온 것도 사실이다. 면도기는 피가 묻는 물건이라 가족이 쓰던 것이라도 공유하지 않는 게 상식인데 왜 그런 짓을 했는가 하면, 여지껏 필립스의 고급 회전식 면도기를 써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왕복식이 회전식보다 절삭력이 좋다고 하는데 과연 사실일까? 상당히 궁금한 사항이었다. 게다가 지금 쓰고 있는 파나소닉의 왕복식 면도기도 주워온 물건인 터라 거부감이랄 게 거의 증발한 상황이었다. 덧붙여 나는 몇 가지 소독 약품도 상비해두고 있으니 제품이 나쁘지 않다면 여분을 정리하고 계속 쓸 각오도 충분히 되어 있었다. (가정에서 따라하지 마세요)

그리하여 입고된 면도기들을 열심히 분해해서 세척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건 있던 의욕도 증발시킬 만한 작업이었다. 철망에서 면도날을 뽑아 보니 털가루가 가득 끼어있었던 것이다. 고압으로 뿜은 물로도 세척하고 소독약으로 소독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까지 완전히 제거해야겠다 싶어 초음파 세척기를 사기로 작정했다. 면도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분해 불가능한 안경의 렌즈와 안경테 사이에 낀 먼지를 빼낼 방법을 찾던 차였으므로 초음파 세척기를 구입한다는 건 제법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싶었다. 일단 갖고 있으면 안경부터 잡다한 액세서리까지 간편히 세척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오만가지 잡다한 물건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사야 할 물건 같기도 했다.

검색해보니 초음파 세척기는 그럭저럭 괜찮아보이는 것이 토스 공동구매에서 2만 원 후반대였다. 가끔 안경이나 잡동사니를 닦자고 망설임 없이 사기에는 미약하게 비싼 가격. 아예 운동화까지 들어가는 크기라면 분명 유용하겠으나, 그것도 아니라 가격도 크기도 애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 없이도 평생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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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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