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
안산 선수에 대한 소위 남초 커뮤니티의 검열과 집단적 인신공격,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감추거나 바꿀 것을 요구하는 억압적 행태는 당연히 해로운 일이며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초 커뮤니티에서 사용된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도 문제지만, 한 사람이 특정한 사상이나 견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상호 존중하의 비판이 아닌 광적인 공격 반응을 보인 사실 자체가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작성하신 글에 대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논평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 역시 이대남 커뮤니티의 문제제기가 잘못되었음에 동의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잡소리"라는 워딩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대남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은 그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단순히 소수 극단적인 남초 커뮤니티의 입장에만 기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번 사례는 그것이 극단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형태의 개인 공격으로 나타난 사례이지만, 이것만으로 이대남의 불만을 단순히 "백래시"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생각일 뿐"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대남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의 이유에 대한 제 생각은 제가 쓴 다른 글<이대남과 페미니즘 문제, 핵심만을 짚자면>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남초 커뮤니티의 반페미니즘 성향이 이대남 일부 극단주의자의 여론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저 글에서 인용한 기사의 데이터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이대남 대부분이 안산에 대한 "페미 공격"...
그럼에도, 작성하신 글에 대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논평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저 역시 이대남 커뮤니티의 문제제기가 잘못되었음에 동의하면서도, 이를 단순히 "잡소리"라는 워딩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대남의 페미니즘에 대한 불만은 그것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서, 단순히 소수 극단적인 남초 커뮤니티의 입장에만 기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번 사례는 그것이 극단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형태의 개인 공격으로 나타난 사례이지만, 이것만으로 이대남의 불만을 단순히 "백래시"나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생각일 뿐"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대남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의 이유에 대한 제 생각은 제가 쓴 다른 글<이대남과 페미니즘 문제, 핵심만을 짚자면>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남초 커뮤니티의 반페미니즘 성향이 이대남 일부 극단주의자의 여론일 뿐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은 저 글에서 인용한 기사의 데이터로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이대남 대부분이 안산에 대한 "페미 공격"...
https://criticalreview.tistory.com/
1. 공화주의
개인의 이기심이 이뤄내는 균형에 막연한 희망을 걸기보다는 타인 및 스스로의 견해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 반성과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규범을 준수하고 조직화된 갈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과정이 굳건한 민주주의와 안정적인 사회 발전을 낳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시민성 함양을 강조하는 공화주의가 민주주의에 결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사회통합론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해결책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역량 자체를 길러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 통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 통합이란 다원화되어있는 사회를 전체주의적으로 통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만이 옳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대방은 처단되어야 할 악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갈등을 조직화된 형태로 표출되게 해 그것이 민주적으로 해결됨으로서 극단적인 분열을 막고 사회 발전을 가능테 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사회 통합론자는 갈등을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적절히 표출되어 상존하는 갈등을 환영합니다. 제때 조직화되고 사회적으로 대의되지 못하는 갈등은 억압과 불만을 낳음으로써, 결국 장기적으로 극단적인 사회 분열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이러한 갈등의 표출이 조직화되어있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 부정을 낳는 듯 파괴적 형태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갈등의 표면적 부재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이 사회 통합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서 어떤 제도적 요소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교육-고용-산업 패키지 제도혁신
구체적으로 관심이 큰 정책분야는 저 세 분야입니다. 교육제도, 고용제도, 산업제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만약 저 중 하나를 바꾸고 싶다면 저 셋을 다 같이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를테면, 한국 산업 생태계에서 스타트업의 역할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싶다면, 창업 지원에 알맞지 않은 교육 제도도 개혁해야 하고, 고용 제도 역시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높은 청년 실업률을 개혁할 것이라면, 안정적인 고용 창출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 생태계 산업 체제 역시 전반적으로 혁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산업제도와 어울리는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이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이를 고려해서, 고용, 교육, 산업 제도의 상호작용을 고려해 한국 경제 체제 전반을 혁신할 수 있는 정책 패키지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4. 이대남 현상의 이해와 젠더, 청년 문제
이대남으로서, 이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주관과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20대 남성 현상의 실제와 이것의 발생 원인 및 긍정적/부정적 기대 효과를 고민하고, 이러한 새롭게 등장한 세대-젠더 갈등 균열을 어떤 식으로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달아주신 댓글은 잘 읽었습니다.
견해 차이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제가 글 쓸 때 표현이 조금 과격하고 주관적이라고 말씀주신 부분도 경청했습니다. 다만 저는 제 메시지를 전달할 최적의 방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정중하게 견해를 전달해주시는 점은 높게 사지만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충분한 공부를 하신 상태인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오용하고 계십니다.
사실 한혁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저널리스트라는 사람들조차 그러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오늘 게재한 연재 3편에서는 바로 그 지점을 다뤘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가 풀리시길 바랍니다.
비율이 완전히 이와 일치하기는 어렵습니다. 동의합니다. 다만 핵심은 66프로를 만든다는 숫자 그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유효한 정치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다수를 본 정책에 끌어들이는 지지세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굳이 숫자로 따지자면, 51프로를 확보하자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가 51프로 이상이 설득이 불가능한 수준의 극단적인, "갑"과 같거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극단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론조사나 연구 데이터도 이를 옹호한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쓴 글 <이대남~>문제에서도 밝혀두었듯이, 이 땅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억압해 온 역사가 너무도 길기에(이건 굳이 이 땅 뿐 아니라, 사실 지구적으로 그래왔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감정은(양보는 굴종이나 다름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여주신 기사에서 나타나는 사례는 저 역시 깊은 유감을 가지고 있고, 이런 부정의를 바꾸어나가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을 더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악과 맞선 타협하지 않는 정의"를 내세우기에는 사회가 너무나 다원화되었고, 타협불가론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민주적 제도 및 문화가 적어도 현 한국 사회에는 마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례에서 더 타당한 방법은 호소력과 포용력 있는 선택으로 지지자를 모으고, 상대방이 우려하는 바에 대해서는 그것이 기우나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설득하거나 납득할만한 반대급부를 제공 가능한 선에서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반드시 금전적, 물질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일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고 분노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볼 때, 대중적인 세력화와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략에 따라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혁 님, 말씀하신 내용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댓글을 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해주신 사고 실험( '가정')에서와 같은 비율 (33% 의 강경파, 33% 의 중도층, 33 %의 변화세력) 에서는 꽤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는 데는 일정 정도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고 실험의 함정 중 하나는 비율이 그와 같지 않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굴종'적인 상황에 처한 이 땅의 역사가 너무 길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굴종'이란 낱말을 본 순간 떠올린 것은 이 장면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1873146
저는 "굴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고려가 상대방에 대한 굴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게 만들 필요가 있겠죠."라는 워딩은 정치적 현실주의가 굴종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굴종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 것입니다. 전략적 현실주의가 자신의 굽혀서는 안 될 신념을 굽히는 수준까지 가면, 그것은 굴종입니다. 그리고 그래선 안됩니다. 저는 오히려 굴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정치적 현실주의가 이상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댓쓴이님과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굴종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상대방과 타협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굴종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굴종과 합의를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장애인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특정 정책(이를테면, 장애인이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전방위 확대)를 옹호해야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이 입장에 반대하는 두 명의 상대방이 있습니다. 당신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찬성해야 정책을 입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명(갑)은 "장애인들은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몸도 불편한 인간들이 왜 사회활동을 하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나?" 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또 한 명(을)은 "장애인 권리도 중요하지만...모든 교통수단을 장애인을 고려해서 만드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들지않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보고 일찌감찌 "저 사람들은 반대 의견이니까 내가 내 주장을 힘껏 주장해봤자 손해만 보겠구나. 포기하자"라고 말하고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굴종입니다. "이 무식한 차별주의자들아, 너희들이 생각이 있니? 제발 장애인 인권 관련 공부 좀 하고와라!" 라고 싸잡아서 욕하는 것이 현실적인 고려를 하지 않는 투쟁주의적 태도입니다. 둘 다 최선의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최선의 전략은 두 사람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선 갑에 대해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서 불편을 겪고 있을 뿐 당신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인격체를 그렇게 얕잡아보는 태도는 잘못되었으며, 이들을 억압하는 당신의 태도는 성찰해보아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 을에게는 "재정 문제에 대한 걱정은 이해하지만, 사회적 활동을 제약받아 평등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그 부당함을 일방적으로 감수하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재정 문제는 장애인들이 사회 생활을 활성화하고 직업을 가짐으로서, 그들 중 다수가 기초생활수급자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면 오히려 더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을만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갑 같은 사람들은 말씀하신대로, 쉽게 설득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합리적이고 진중한 비판에 대해서도 무례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을의 관점에서 봅시다. 을이 보기에, 둘 중 한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면 상대적으로 더 공격적이고 일방적인 갑과 신념을 명확히 밝히되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풀어내는 정책제안자 중에서 누구의 편을 들고 싶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갑과의 토론은 갑보다는 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품격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을 역시 정중하게 대해야 하겠죠.
그리고 말씀하시는대로 정치적 현실주의가 굴종으로 갈 위험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굴종으로 가서는 절대로 안돼"라는 걱정에 기반해서 사회적 합의와 타협을 포기하는 태도는 더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한 끗 차이" 바로 그 한 끗 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야 하기에 정치가 어려운 것이겠죠. 이 균형잡기는 물론 탁월한 줄타기꾼처럼 할 수도 있다면 대단한 수준이겠지만,
*난민을 빠트린 것은 굳이 댓쓴이님께서 적은 내용을 전부 옮겨 적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제 개인적인 주관을 말씀드리면 저는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난민 혐오 정서나 이슬람/중국 등 특히 비서구 문화권에 대해 "덮어 놓고 혐오하는" 정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혁 님의 답글에 '난민'이 빠져 있는 것을 몹시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난민혐오는 쉽게 옹호되고, 난민혐오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반감을 품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우 다수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적어주셨듯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고려'를 요구하는 것과 '상대방(다수자)에 대한 (완곡어법에 기반한) 굴종'을 요구하는 것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혁 님께서 먼저 "굴종"이라는 낱말을 꺼내신 것에서 다소 충격을 받습니다. (한혁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지만, 한혁님의 댓글은) 이른바 '장애인차별'처럼 한혁 님 기준에서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면 전략적으로 굴종하셔야 한다는 말씀처럼 들리니까요. 물론 그 굴종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습니다만. "굴종"이라. 굴종. 이 낱말을 꺼내시게 된 연원은 무엇일까요.
일단 사적인 자리에서 개인적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애인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옹호하거나, 그런 주장을 비난하는 것을 보고 반감을 품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매우 소수일 것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볼 때, 이런 상식적인 수준에서 도덕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합의가 있는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사회 개혁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소수의 "비상식적인 이들"의 반동이 거세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떄문이죠. 문제는 이대남-페미니즘 이슈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합의된 선/악의 기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극심한 갈등 및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상대방이 그런 입장을 가지는 배경 및 맥락을 이해하려고 하고, 최소한의 워딩 상의 존중이 도덕적으로도 바람직함은 물론, 상대 진영의 반감을 최소화하는 정치적으로도 타당한 전략일 수 있습니다. 내 생각과는 별개로 "사회적으로 확실한 정답"이 부재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 노동자 계층이 인권 억압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인권 억압적이기 때문에 나빠요 트럼프 뽑으면 무식한 레드넥이에요"라는 프레이밍이 반감으로 말미암아 트럼프 당선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신념을 얼마나 강경하게 관철할 것인지"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며, 계속해서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고려가 상대방에 대한 굴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게 만들 필요가 있겠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첨언하자면, 신념에 대한 저의 생각은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이의 신념과 자신을 위해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자의 신념은 다르다는 것인데, 정말 극단적인 예외사례에서는 죽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독재정부 등 눈에 보이는 억압의 거악과 싸울 때는 다른 수단이 전무하니 투쟁을 불사해야겠죠. 다만 이는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관철되기 어려운 전략인 듯 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인종차별 발언, 장애인차별 발언, '난민 신청자들은 기생충이니 다 불태워 버려야 해'같은 발언, 그런 심각한 수위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거대한 악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그저 동료 시민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자신의 발언이 딱히 문제되는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 붙잡고 설명하려 들어도 '다른 중요한 일'에 시간을 쓰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는 한혁 님께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장애인은 모두 죽어야 한다 따위의 혐오표현 앞에서 한혁 님은 본문 중 말씀하신 "최소한 워딩 상의 존중"을 어떻게 실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누군가더러 죽어야 한다'라는 표현을 보고 '어떻게그런 끔찍한 말을...' 이라고 하는 것마저 '워딩상의 존중이 아니니 절제해야만 해, 네가 사회변화 발전 방향에 조금이라도 뜻이 있다면 네가 참야아만 하지' 라고 하실 것인지.
달아주신 댓글은 잘 읽었습니다.
견해 차이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제가 글 쓸 때 표현이 조금 과격하고 주관적이라고 말씀주신 부분도 경청했습니다. 다만 저는 제 메시지를 전달할 최적의 방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정중하게 견해를 전달해주시는 점은 높게 사지만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충분한 공부를 하신 상태인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오용하고 계십니다.
사실 한혁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저널리스트라는 사람들조차 그러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오늘 게재한 연재 3편에서는 바로 그 지점을 다뤘습니다.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가 풀리시길 바랍니다.
@한혁 님, 말씀하신 내용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댓글을 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해주신 사고 실험( '가정')에서와 같은 비율 (33% 의 강경파, 33% 의 중도층, 33 %의 변화세력) 에서는 꽤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는 데는 일정 정도 수긍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고 실험의 함정 중 하나는 비율이 그와 같지 않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굴종'적인 상황에 처한 이 땅의 역사가 너무 길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제가 '굴종'이란 낱말을 본 순간 떠올린 것은 이 장면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1873146
저는 "굴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고려가 상대방에 대한 굴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게 만들 필요가 있겠죠."라는 워딩은 정치적 현실주의가 굴종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굴종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한 것입니다. 전략적 현실주의가 자신의 굽혀서는 안 될 신념을 굽히는 수준까지 가면, 그것은 굴종입니다. 그리고 그래선 안됩니다. 저는 오히려 굴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정치적 현실주의가 이상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댓쓴이님과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굴종이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상대방과 타협하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굴종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굴종과 합의를 구분하는 방법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장애인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특정 정책(이를테면, 장애인이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전방위 확대)를 옹호해야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이 입장에 반대하는 두 명의 상대방이 있습니다. 당신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찬성해야 정책을 입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명(갑)은 "장애인들은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몸도 불편한 인간들이 왜 사회활동을 하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나?" 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또 한 명(을)은 "장애인 권리도 중요하지만...모든 교통수단을 장애인을 고려해서 만드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들지않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보고 일찌감찌 "저 사람들은 반대 의견이니까 내가 내 주장을 힘껏 주장해봤자 손해만 보겠구나. 포기하자"라고 말하고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는 것이 굴종입니다. "이 무식한 차별주의자들아, 너희들이 생각이 있니? 제발 장애인 인권 관련 공부 좀 하고와라!" 라고 싸잡아서 욕하는 것이 현실적인 고려를 하지 않는 투쟁주의적 태도입니다. 둘 다 최선의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최선의 전략은 두 사람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전략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선 갑에 대해서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부득이한 상황으로 인해서 불편을 겪고 있을 뿐 당신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인격체를 그렇게 얕잡아보는 태도는 잘못되었으며, 이들을 억압하는 당신의 태도는 성찰해보아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 을에게는 "재정 문제에 대한 걱정은 이해하지만, 사회적 활동을 제약받아 평등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그 부당함을 일방적으로 감수하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재정 문제는 장애인들이 사회 생활을 활성화하고 직업을 가짐으로서, 그들 중 다수가 기초생활수급자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면 오히려 더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을만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갑 같은 사람들은 말씀하신대로, 쉽게 설득되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합리적이고 진중한 비판에 대해서도 무례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을의 관점에서 봅시다. 을이 보기에, 둘 중 한 사람을 지지해야 한다면 상대적으로 더 공격적이고 일방적인 갑과 신념을 명확히 밝히되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풀어내는 정책제안자 중에서 누구의 편을 들고 싶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갑과의 토론은 갑보다는 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품격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을 역시 정중하게 대해야 하겠죠.
그리고 말씀하시는대로 정치적 현실주의가 굴종으로 갈 위험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만, "굴종으로 가서는 절대로 안돼"라는 걱정에 기반해서 사회적 합의와 타협을 포기하는 태도는 더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한 끗 차이" 바로 그 한 끗 위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야 하기에 정치가 어려운 것이겠죠. 이 균형잡기는 물론 탁월한 줄타기꾼처럼 할 수도 있다면 대단한 수준이겠지만,
*난민을 빠트린 것은 굳이 댓쓴이님께서 적은 내용을 전부 옮겨 적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제 개인적인 주관을 말씀드리면 저는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나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난민 혐오 정서나 이슬람/중국 등 특히 비서구 문화권에 대해 "덮어 놓고 혐오하는" 정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발언, 장애인차별 발언, '난민 신청자들은 기생충이니 다 불태워 버려야 해'같은 발언, 그런 심각한 수위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거대한 악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고 그저 동료 시민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자신의 발언이 딱히 문제되는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 붙잡고 설명하려 들어도 '다른 중요한 일'에 시간을 쓰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저는 한혁 님께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장애인은 모두 죽어야 한다 따위의 혐오표현 앞에서 한혁 님은 본문 중 말씀하신 "최소한 워딩 상의 존중"을 어떻게 실현해야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누군가더러 죽어야 한다'라는 표현을 보고 '어떻게그런 끔찍한 말을...' 이라고 하는 것마저 '워딩상의 존중이 아니니 절제해야만 해, 네가 사회변화 발전 방향에 조금이라도 뜻이 있다면 네가 참야아만 하지' 라고 하실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