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활자 보듯 보는 사람들

뉴필로소퍼
뉴필로소퍼 인증된 계정 · 일상을 철학하다
2023/01/12
“이것 봐요, 백설공주가 커졌어요.” 나와 그림책을 보던 딸이 말했다. 놀란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니, 저쪽에 멀리 있는데도 작아지지 않네.” 딸이 나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봤다. 백설공주가 멀리 있지도 않은데(백설공주는 계속 책 속에,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나는 왜 멀리 있다고 말했을까?


인쇄술이 변화시킨 인류의 감각

감각의 차원을 진실되게 살아갈 때 
일종의 혼미함을 경험하게 되듯이,
 모든 감각은 꿈 혹은 이인증의 씨앗을 내포한다.
_《지각의 현상학》(1945년), 모리스 메를로-퐁티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매클루언은 《구텐베르크 은하계》라는 독창적인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선교사가 오지 사람들에게 모기 퇴치 방법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영상 속 남자는 물이 고여 있던 병과 용기를 천천히 뒤집는다.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모든 사람이 남자가 아닌 닭을 이야기한다. 선교사가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돌려보자 화면 위쪽 한구석에서 닭 한 마리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일러스트: 아이다 노보아&카를로스 이건
 
이 이야기에 대해 매클루언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창밖을 내다보듯 영상을 보지만, 오지 사람들의 훈련받지 않은 눈은 프레임 단위로 하나하나 쪼개서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각 프레임은 순식간에 지나갔기 때문에, 그들은 영상의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지 못했다. 원근법처럼 영상도 고정 시점을 유지하고 무심하게 봐야 한다. 전체 화면을 보려면 스크린 앞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서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오지 사람들은 영상을 무심하게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스크린은 스크린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며, 매클루언의 말처럼 그들은 “온전히 그 사물과 함께” 있다. 그래서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간다.”
   
여기에는 오지 사람들이 영상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 있지 않다. 그들은 작문과 인쇄술이 없는 구전 문화권에 살아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시점을 갖추지 못했다. 매클루언이 보기에, 미디어 기술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감각을 확장시켜 우리와 세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한 사회의 역사적 궤적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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