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에 조민, 「초혼사기」에 대하여
2024/03/25
나카에 조민은 동양의 루소, 국권론에 반대한 민권론자, 이상적 민주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루소'나 '민권론'이나 '이상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것들인지 사람들이 그다지 고려에 넣지 않더라도 무리가 아니다. 단, 끔찍함 쪽을 들여다보는 게 도리어 공평을 잃지 않는 방법이 될 때도 있다. 나카에 조민의 전집에 실린, 그가 쓴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은 야스쿠니 신사의 전신인 도쿄 초혼사에 관한 글이다. 거기엔 보신전쟁과 세이난전쟁 및 막말유신기 여러 내전에서 신정부 편에 서서 싸우다 죽은 군인들의 영령이 모셔져 있었다. 조민은 막말유신기의 내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1887년 「청년배 뇌수중의 망념」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청년 제군이여, 경들의 조부 혹은 부친 중에는 이 망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약간의 사업을 건립하는 데 이르고 약간의 명성과 영예를 발양할 수 있었던 자도 실제로 있다. 소위 망념도 당시에는 망념이 아니고 선념이었다."[1] 여기서 망념이란 "장상의 사업을 온갖 사업 중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 "정치의 학문이 모든 학문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87년에 청년이라면 67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다. 그 청년 세대의 아버지 세대라면 67년에 20대 전후였을 것이다. 조민 자신이 바로 "명치 금대 청년배"의 부모 세대였다. 그는 1847년에 도사번 고치현에서 태어났다. 이토 히로부미보다 6살 연하, 이타가키 다이스케보다 10살 연하다.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 집안의 장남이었다. 16세인 1862년, 그 해에 새로 생긴 번교에 입학하여 유학을 배웠는데, 3년 후인 1865년 번의 명령으로 나가사키에 가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866년에 에도로 유학을 떠난다. 1867년에는 요코하마에서 카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고, 68년에는 미쓰쿠리 린쇼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왕정복고와 보신전쟁 시기에 그는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자신의 어학력을 활용하여 에도에서 이러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