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장자 아닌 죽은 세자 '동생'이 왕 되다
[조선 왕실 암투사-예종]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까지 어겨가며 ‘비정상’의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여럿 있는데, 이 왕들은 과연 자신의 왕위를 어떤 방식으로 물려주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까지 어겨가며 ‘비정상’의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 여럿 있는데, 이 왕들은 과연 자신의 왕위를 어떤 방식으로 물려주었을까.
일단 지금까지의 경우에서 이 범주에 드는 왕은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태종이다. 태종은 정비 소생의 맏아들인 ‘적장자’ 원칙을 지켰다. 왕자 시절에 낳았지만, 왕이 된 이후 맏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세조의 뒤를 이은 문종은 정통성 면에서는 그 어떤 시빗거리도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범주에 드는 또 한 명의 왕 세조는 어땠을까.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었던 ‘계유정난’은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시대에 정말 ‘뜨거운 감자’였다. 이런 식의 ‘정난’이 과연 유교적 질서에 맞는 것인가. 특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사림들은 도무지 이런 정변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서 숱하게 계유정난을 비판했다가 귀양 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 유명한 사화(史禍)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세조가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까 하는 점은 남다른 관심을 끌었을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왕위계승과 관련해 왕 못지않게 왕의 부인도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자든 서자든 아들을 낳은 왕의 정비나 후궁의 입김이 막강했다. 특히 적장자의 어머니라면 그 권력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정도였으리라. 세자로 책봉되고, 그리고 왕위를 오를 미래권력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세조 대의 왕실 분위기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다. 세조는 비교적 여자 문제에서는 크게 흠잡을 데 없는 것 같다. 후궁을 많이 두지도 않았거니와, 대신들이 권하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다했다고 한다.
세조에게는 정비인 정희왕후 말고 세 명의 후궁이 있었다. 근빈 박씨((謹嬪 朴氏)와 숙원 신씨, 그리고 소용 박씨. 근빈 박씨는 후궁 중 유일하게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아마도 수양대군 시절에 첩으로 인연을 맺은 것 같다.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항간에 박팽년의 누이라는 얘기가 돌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