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의 날, 기억해야 할 푸른눈의 은인들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4/09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받은 것은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어마어마한 ‘인혁당’ 사건의 개요를 발표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중앙정보부장까지 나서서 발표한 ‘대규모’는 총 57명이었다. 1개 소대급의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한다는 대한민국 공안당국 특유의 허장성세의 전통은 이토록 유구하거니와, 이 사건 당시까지만 해도 기개가 살아 있었던 대한민국 검사들이 중앙정보부의 요구대로는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쓰고 나올 정도로 무리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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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인혁당의 이름이 사람들의 귓전을 강타한 것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살천스러운 동토의 유신 공화국이 콸콸 독기를 내뿜던 74년 4월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재건위원회가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관련자 240명을 쓸어담았다. 그 가운데 최종 기소된 것은 38명이었고, 그 가운데 8명에게 대법원은 사형을 선고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대법원장의 선고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 했다. 1975년 4월 8일이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어디에 폭탄을 터뜨린 것도 아닌데 사형이라니! 피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피고인들의 이 법정에서의 전부 또는 일부 부합되는 각 진술 부분”을 근거로 모든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당최 검찰의 공소사실을 시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심과 2심, 3심에 이르도록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면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호사도 기관원 입회 하에 만나야 했다. 형용할 수도 없고 상상도 어려운 분위기에서 사형이 확정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다음 날 기절도 모자랄 충격이 인혁당 피고인들과 가족들을 덮친다.

사형 판결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8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단행된 것이다. 사형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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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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