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에 대하여 -'낙랑회는 이대생 성상납' 논란에 부쳐
2024/04/03
과유불급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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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설민석씨가 홍역을 치른 기억이 난다. “당일날 민족 대표들은 현장에 나가지 않고 광화문에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 룸살롱인 태화관에 가서 술판을 벌였다.”거나 “33인 대부분이 변절자.”라는 식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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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 민족대표라는 사람들이 약속된 장소에 오지 않고, 심지어 학생들이 달려와 여기서 뭐하는 거냐고 아우성을 쳐도 고급 식당에 눌러앉아 만세 부르고 경찰서에 스스로 신고하고 잡혀가는 모습에는 기미년 당시에도 비판적인 시선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견이 있을망정 그들의 행동을 ‘비겁하다’고 공박하기는 어렵다. 더하여 서너 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끝까지 저마다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갔다. ‘33인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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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 강사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80년대를 풍미했던 ‘민중 사관’의 영향일 수도 있다고 본다. 도대체 천도교 대표, 기독교 대표, 불교 대표가 무슨 ‘민족 대표’냐며 따지며 3.1 운동은 그들이 주도한 게 아니라 민중들이 주도한 것이라는 식의 엄숙한 역사 세미나를 나 역시 받은 바 있으니까 말이다. 충분히 그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민중 사관이든 유물 사관이든 기독교 사관이든 역사를 각자의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금기에 가까운 전제가 따른다. 해석을 위하여 사실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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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계급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 반기를 들고 피지배계급의 역동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훌륭한 접근이다. 예컨대 이순신과 함께 싸운 수군들, 역사적 관심에서 벗어난 말단 수군들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 그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환경은 어땠는지,어떤 무기로 싸웠는지 등등을 밝히는 것은 탁월한 연구다. 그런데 “이순신의 위업은 과장된 것이고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승리는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노를 젓고 활을 쏘고 포를 쏜 수군 병사들의 승리였다.”고 하면 대략난감해지는 것이다. 똑...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친일파(일본제국부역자)라도 조선인 삶의 질에 기여하면 옹호하고 항일독립운동가라도 조선인 삶의 질에 기여못하고 사회 혼란하면 비판받아야합니다.
일제시대는 한반도의 암흑기는 아니었고 이씨조선왕조는 스스로 이씨조선을 유지할 힘을 잃었기 때문에 이씨조선왕조가 일본에 나라를 팔았습니다. 을사오적 대신들도 고종이 나라를 팔았는데도 불구하고 5대4로 나라를 팔게되었는데 당시 조선 선비들은 왕을 욕할수없으니 대신들을 대신 욕한거고 을사오적은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는 한반도 암흑기가 아니었고 그냥 일본제국의 병합국이 되었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