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9
김민준님의 정성스러운 답글 감사합니다. 결론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나 도달하는 과정에 차이가 크고, 제가 주요하게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그 과정의 전제에 있었기에 다시 답변 드립니다.
1. 얼룩소는 민주주의 공동체인가
물론 한없이 넓게 보면 들어가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 공동체의 조건은 최소한 구성원이 집단의 구성과 운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열려있느냐 즉, 해당 공동체가 얼마나 구성원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있느냐 입니다. 이 부분에서 일단 얼룩소는 민주주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더불어 제시하신,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따르면 얼룩소가 부르주아지 공론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며, 되려 그가 주장한 현대 자본주의들어 붕괴된 공론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바로...
1. 얼룩소는 민주주의 공동체인가
물론 한없이 넓게 보면 들어가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 공동체의 조건은 최소한 구성원이 집단의 구성과 운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열려있느냐 즉, 해당 공동체가 얼마나 구성원의 합의를 바탕으로 하고있느냐 입니다. 이 부분에서 일단 얼룩소는 민주주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더불어 제시하신,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 따르면 얼룩소가 부르주아지 공론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며, 되려 그가 주장한 현대 자본주의들어 붕괴된 공론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바로...
저는 말씀하신 사항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얼룩소가 광고를 받지 않고, 지속가능한 모델을 새우려면 결국 '얼룩패스'로 돈을 벌어야 할 것입니다. 투자금은 언젠가 고갈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문제는 얼룩패스로 매번 '9900'원씩 벌면, 무조건 그보다 적은 돈을 얼룩커들에게 나눠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에디터들에게 월급도 줘야하고, 시스템 유지비도 필요하고 등등
결국 9900원 이하를 받은 얼룩커 분들 중에서 이탈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얼룩패스로 들어오는 수입도 줄 것입니다. 결국 악순환이 되는 것이죠.
이 악숙환을 극복하려면 얼룩소 입장에서는 결국 얼룩패스를 사용하지만, 수익은 신경쓰지 않은 콘텐츠 소비층이 필요합니다. 마치, 넷플릭스를 보면서 수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콘텐츠 소비층을 유인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가 필요한 상황이고, 저는 그게 현재 얼룩소가 하는 새로운 실험의 방향성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기준이 지금 정립단계이기 때문에 얼룩소, 기존 얼룩커, 새로운 얼룩커 사이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떤 방향성으로 확정이 될 것인데, 그게 어떤 모습일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공익과 사익이 혼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결국 동일한 현상판단 위에 평가의 차이 같네요.
김민준님께서 얼룩소의 가치지향과 그것이 가지는 희망에 더 방점을 찍으셨다면, 저는 지극히 현재로서 가치의 판매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입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둘이 다르지 않으며, 다만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판매가 설사 가치를 순전히 상품으로만 취급한다한들 그것이 가지는 공익성을 폄하할수는 없을겁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치를 대하는 태도, 취급하는 방식의 러프함이 소비자에게 눈치채어 가치를 훼손시키는 상황이 발생하느냐 아니냐겠지요.
현재의 얼룩소는 아직 그 경계에는 다가서지 않았다고 봅니다. 즉, 저도 아직 이 공간에 대해 희망적입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역시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잘 못쓴 탓인지 하버마스 공론장 개념과 얼룩소의 연관성에 대해 잘 전달이 안 된 것 같아서 덧붙여요. 저는 하버마스 공론장 개념과 현재의 얼룩소 운영 방식이 합치하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얼룩소가 그것을 '지향'하고 있음은 여러 근거를 통해 증명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향하는 것과 그것에 도달한것은 다르기에, 우리는 또 다양한 근거들을 통해 얼룩소가 민주주의 공론장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을 얼룩소라는 '서비스' 내에서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겠구요.
덧붙여, '(얼룩소와 얼룩커 모두)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공론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얼룩소와 얼룩커 모두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는가? 얼룩소가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선의를 믿는 것으로 최대한 밀어붙이기로 하자면, 사실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준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주체라는 존재를 상정했을 때 다소 비합리적인 선택이긴 합니다. 기존의 커뮤니티 플랫폼들에서 이용자들에게 글을 쓴다고 돈을 주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얼룩소라는 기획에 담긴 의지는 '실험적'이긴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실험이라는 것도 얼룩소라는 '기업'이 감당가능한 선까지 진행될테지만, 어쨌거나 굳이 할 필요 없었던 실험을 언론사라는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던 이들이 그 직장을 뛰쳐나와서 할 동인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룩커는? 얼룩소의 애초 기획에 담긴 정신을 제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저는 '공익-사익의 합치 추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얼룩커가 받아가는 돈은 공론에 기여한 만큼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룩소라는 회사와 계약하여 일을 하고 받아가는 돈이 아니라, 얼룩소가 펼쳐놓은 온라인 사이트라는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있는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냈느냐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얼룩소가 기획단계에서 설정한 보상체계에 담긴 정신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발생합니다. 가치있는 사회적 논의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이것이 이용자들이 납득가능할 것인지는 다른 이슈인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얼룩소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 모습'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앞서 저는 '공론장을 지향하고 있으나 그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한 것처럼 '더 나은 정치적 논의라는 공익을 앞세우고 그것이 사익과 합치되도록 하는 공론장을 지향하고 있느나 그것 역시 그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방향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라는 것이죠. 저는 얼룩소가 "생활세계의 시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공적 의견 및 의지 형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공론장"을 구축하고, 그곳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공익과 사익이 부합하는 지점을 잘 건드리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원론적인 논의의 내용과 닮아 있지만 실제로 구현해내지는 못한.
정성스러운 피드백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역시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잘 못쓴 탓인지 하버마스 공론장 개념과 얼룩소의 연관성에 대해 잘 전달이 안 된 것 같아서 덧붙여요. 저는 하버마스 공론장 개념과 현재의 얼룩소 운영 방식이 합치하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얼룩소가 그것을 '지향'하고 있음은 여러 근거를 통해 증명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향하는 것과 그것에 도달한것은 다르기에, 우리는 또 다양한 근거들을 통해 얼룩소가 민주주의 공론장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을 얼룩소라는 '서비스' 내에서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겠구요.
덧붙여, '(얼룩소와 얼룩커 모두) 사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르주아 공론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얼룩소와 얼룩커 모두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는가? 얼룩소가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선의를 믿는 것으로 최대한 밀어붙이기로 하자면, 사실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준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제주체라는 존재를 상정했을 때 다소 비합리적인 선택이긴 합니다. 기존의 커뮤니티 플랫폼들에서 이용자들에게 글을 쓴다고 돈을 주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얼룩소라는 기획에 담긴 의지는 '실험적'이긴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실험이라는 것도 얼룩소라는 '기업'이 감당가능한 선까지 진행될테지만, 어쨌거나 굳이 할 필요 없었던 실험을 언론사라는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던 이들이 그 직장을 뛰쳐나와서 할 동인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얼룩커는? 얼룩소의 애초 기획에 담긴 정신을 제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저는 '공익-사익의 합치 추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얼룩커가 받아가는 돈은 공론에 기여한 만큼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룩소라는 회사와 계약하여 일을 하고 받아가는 돈이 아니라, 얼룩소가 펼쳐놓은 온라인 사이트라는 공간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있는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냈느냐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얼룩소가 기획단계에서 설정한 보상체계에 담긴 정신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발생합니다. 가치있는 사회적 논의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이것이 이용자들이 납득가능할 것인지는 다른 이슈인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얼룩소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는 모습'의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고요. 그래서 앞서 저는 '공론장을 지향하고 있으나 그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한 것처럼 '더 나은 정치적 논의라는 공익을 앞세우고 그것이 사익과 합치되도록 하는 공론장을 지향하고 있느나 그것 역시 그 목적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방향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라는 것이죠. 저는 얼룩소가 "생활세계의 시민들에 의한 자발적인 공적 의견 및 의지 형성의 공간으로서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공론장"을 구축하고, 그곳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공익과 사익이 부합하는 지점을 잘 건드리면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하버마스가 이야기하는 원론적인 논의의 내용과 닮아 있지만 실제로 구현해내지는 못한.
저는 말씀하신 사항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얼룩소가 광고를 받지 않고, 지속가능한 모델을 새우려면 결국 '얼룩패스'로 돈을 벌어야 할 것입니다. 투자금은 언젠가 고갈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문제는 얼룩패스로 매번 '9900'원씩 벌면, 무조건 그보다 적은 돈을 얼룩커들에게 나눠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에디터들에게 월급도 줘야하고, 시스템 유지비도 필요하고 등등
결국 9900원 이하를 받은 얼룩커 분들 중에서 이탈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얼룩패스로 들어오는 수입도 줄 것입니다. 결국 악순환이 되는 것이죠.
이 악숙환을 극복하려면 얼룩소 입장에서는 결국 얼룩패스를 사용하지만, 수익은 신경쓰지 않은 콘텐츠 소비층이 필요합니다. 마치, 넷플릭스를 보면서 수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콘텐츠 소비층을 유인할 수 있는 '양질의 콘텐츠'가 필요한 상황이고, 저는 그게 현재 얼룩소가 하는 새로운 실험의 방향성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양질의 콘텐츠에 대한 기준이 지금 정립단계이기 때문에 얼룩소, 기존 얼룩커, 새로운 얼룩커 사이에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떤 방향성으로 확정이 될 것인데, 그게 어떤 모습일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공익과 사익이 혼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당연히 동의합니다. 결국 동일한 현상판단 위에 평가의 차이 같네요.
김민준님께서 얼룩소의 가치지향과 그것이 가지는 희망에 더 방점을 찍으셨다면, 저는 지극히 현재로서 가치의 판매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입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둘이 다르지 않으며, 다만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판매가 설사 가치를 순전히 상품으로만 취급한다한들 그것이 가지는 공익성을 폄하할수는 없을겁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치를 대하는 태도, 취급하는 방식의 러프함이 소비자에게 눈치채어 가치를 훼손시키는 상황이 발생하느냐 아니냐겠지요.
현재의 얼룩소는 아직 그 경계에는 다가서지 않았다고 봅니다. 즉, 저도 아직 이 공간에 대해 희망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