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말해보자면] 비동의 간음죄와 '대大찐따'의 시대에 대한 지젝의 일갈!
2023/01/31
이 글은 과거 정의당 내부에서의 성폭력 사건에 관한 논평에서 나온 것인데 비동의 간음죄와 연결해서도 의미가 있다 생각되어 갈무리하여 올립니다. 표현의 과격함이나, 불쾌함을 유발할 수 있는 표현 등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에서 '찐따'들을 양산하는데 있어 좌파 이론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지젝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저 또한 그의 인식에 동의하는 바가 있어 지젝을 소개하는 겸해서 적은 글이니 생각할 지점을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적극적 동의'와 '주체적인 섹스'라는 건 환상이라는 게 이 글의 논지입니다. 이 글은 그 연장에서 법이 그것을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맞이하게 될 상황은 적어도 좌파가 지향하는 '사회적인 것'이 나타나는 과정이 아니라 주장합니다. 아마 당신은 이 글을 '여성혐오적'이라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글을 올리고 달린 수많은 반박(?) 댓글들과 비판글들 상당수가 지젝과 함께 저를 여성혐오자라 규정했습니다. 당신은 그럴지 안 그럴지도 궁금한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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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의'란 객관적으로 입증가능한가?
지젝은 현대의 여성해방 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미국의 남녀들이 섹스를 하기 전에 여성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계약서를 쓴다고 한탄하며 이러한 "적극적인 동의"라는 관념 자체가 허상임을 지적한다. 그것을 완벽하게 객관화 해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진보좌파들은 특정한 사례를 통해 거듭해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동의'라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법을 바꾸려 시도한다. 과연 '(적극적인) 동의'는 입증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지젝은 주체를 구성하는 자아, 초자아, 원초아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 자아는 초자아의 도덕적 압력 때문에 섹스를 하기 싫다고 말하지만 원초아는 들끓는 욕망으로 그것을 거절하기 힘들다고 한다면? 이와 반대로 ...
@leeverpool 지젝이 말하는 '소비주체'는 소비자본주의를 전제로 합니다. 소비자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본래적으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인공적으로 욕망의 향유를 창출하고, 무제한의 소비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체계입니다. 만약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지 못한다면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고 공황과 불경기에 빠집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광고는 바로 그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유통' 부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생산보다도 소비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사회입니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일본기업 MUJI의 회장이 보드리야르의 이 책을 읽고 창업을 해서 성공했다고 하니 이 책이 얼마나 날카롭게 현실을 포착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습니다)가 말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생산물'만'을 소비하지 않고 "기호" 자체를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이지 않은 소비랄까요? 상징과 기호를 소비하면서 그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모든 게 그렇게 "취향"화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향유하라! 그리고 즐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보편화된 게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시대라고 지젝은 봅니다. 지젝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이제 자본은 국가의 틀 안에 머물지 않고 전세계적 규모로 이동하고 국경을 없애버립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모든 '금지'의 원칙이 무너지고 자본이 제공하는 '향유'의 명령에 종속된 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 1970년대를 전후로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천박하게 말하자면 내가 내 취향대로, 내 마음대로, 내 돈 갖고 향유하겠다는데 니들이 뭔데? 알빠임? 이라는 주체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막스 베버가 말했던 것과 같은 금욕을 통한 자본축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이 과시하고 더 많이 향유하는 주체를 원하며 개인의 무한한 '취향'을 보편화하죠. 한국으로 치자면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학생운동권마저 무기력해진 뒤에 나타난 X세대와 그 이전 386세대 간의 차이랄까요?
그런데 이렇게 나타난 소비주체들은 '자기애적'인 성향이 강할뿐만 아니라 나약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글이 설명했으니 줄이겠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지젝은 어떤 주체성을 지향하는가? 그는 "진리의 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풍조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건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렸지요. 지젝은 다시금 진리가 무엇인지 선언하고 결단을 내리는 정치를 원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배제된, 향유할 수 없는 주체들. 이른바 호모 사케르라 지칭되기도 하는 비주체들을 주체화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보편적인 주체를 창출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누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누군가의 향유가 누군가의 배제가 되는 이 기제 자체를 파기하고 보다 보편적인 주체 형성으로 나가야 한다는 게 지젝의 입장입니다.
흠, 알듯 말듯하죠? 사실 지젝의 한계는 비판과 달리 본인이 형성하고자 하는 게 뚜렷하지 않다는데서 나옵니다. 이럴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좌파들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말했던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나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는 문구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만 사실 약간 허망합니다. 비판, 안티테제로서 의미 있는 거니까요. 실천적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나올거라는 그 막연함이 지젝의, 아니 현재 대부분의 좌파 이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훈 사법제도의 강제는 이미 우리가 매일매일 겪고 있습니다. 가까운 법원 앞에 가셔서 판결을 받고 나오는 이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대부분 화가 많이 나있습니다. 판사가 '정의'를 구하지 않고 이상하게 판결을 내린다고 화를 내고 항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판사의 판결을 통해서 매일매일 국가폭력의 갈등관계의 강제적인 해소를 겪습니다. 이 근대체제 자체가 시스템적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세베 야스오 등이 쓴 <헌법논쟁>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헌법이라는 건 본래적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제한하기 위한 시스템이라는 게 이 책의 논지인데 앞서 말한 맥락에서 그렇습니다. 젊은 마르크스도 선생님처럼 그것조차도 궁극적으로 '폭력'이며, 국가의 전제적 지배로 향하는 길을 열게 된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선생님의 입장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런 종류의 폭력은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한국과 중국의 법문화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예컨대 심재우 선생님의 조선법문화사 연구를 참고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만, 우리는 유럽적 법문화와 많은 지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유럽인들은 이미 고전고대 그리스로마 시절부터 개인의 권리 간의 충돌을 공동체 앞에서 호소하고 누가 더 보편에 닿는지 여부를 통해 결정했습니다만,
우리는 전제군주 혹은 사법적 권한을 지닌 관료에게 엎드려 호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유교적 맥락에서 소송이란 중재를 통해 갈등의 최소화를 통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지, 개인들 간의 권리가 구제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중재'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여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게 유교적 정치의 핵심이었지요. 그로 인해서 소송주체 당사자들은 그들을 굴복시킬 강력한 확정력을 지닌 판결이 없었기 때문에 거듭해서, 끝까지,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까지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도뢰(圖賴)'라 합니다. 궁금하시다면 심재우 선생의 이 짧은 글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30 을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런 법문화가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앞서 말한 정의의 구현을 추구하는 식의 이해가 대표적인 조선시대 더 나아가서는 전제국가의 법문화의 유산이 아닌가 합니다. 좌파를 자처하는 저로서는 이러한 법문화와 근대적 법문화 간의 차이를 최소화하고 보편적인 합의의 틀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하고자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보편성'의 폭력과 강제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위험한 방향으로 논리가 뻗어갈 수 있다는 점도 알지만 본디 '대표제'라는 것은 인민의 "복종"을 전제로 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원리인 자기통치의 구현을 대표제를 통해서 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대표자한테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막스 베버가 강조했던 지점이지요. 베버는 이 문장 뒤에 그 다음에 잘못했으면 대표자의 목을 날려버리는 게 민주주의라 덧붙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정당한' 권위에 복종하는 법을 배울 필요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의 보편화가 어떻게 자기애적 주체성을 만들게 되는지 그렇다면 지젝이 지향하고자 하는 주체성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현실적 차원에서의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의도는 이해합니다만,그것이 주권재민의 법칙보다 우선되서는 안될것입니다. 제도적 강제성이 어느정도 필요한것은 동의합니다만 애초에 인간사회에서 의견갈등의 완벽한 해소와 의견의 합치는 불가능한 일인데,사법제도의 강제성이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시는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갈등해결의 방법을 그런 차원에서 시도하시는것은 제도의 전제화가 될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에서 '모든'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한것은 사회제도가 개인의 의견보다 우선되서는 안된다는것, 개인의 자주성이 갖는 의미가 중대하다는 것을 얘기한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소 비난이 거셌다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말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새롭게 되어야한다.는 독재를 향한 열렬한 투쟁의 필요성을 주창한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고 싶어 흥분한 것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맞습니다. 결국 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차원이 중요해지는데 저는 그것이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사회에게 강요하는 이중성을 지니는 방향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개인이 자신의 주장, 혹은 개별적인 의지를 '보편화'하며 사회에 강요하는 방향과 반대로 사회가 그것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보편화에 대항해 사회의 원리를 개인에게 강요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문제가 해결되리라 봅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는 두 의지 간의 대립이 '해결'을 보지 못하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는 근대국가의 사법기구가 지닌 '폭력성'이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소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좌파정당들은 자기 내부의 규율 원리를 근대 사법기구의 원리와 비교하면서 전자의 유용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근대국가와 경쟁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보편성 실현에 복무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젝의 글을 빌려 제가 논하고자 했던 점은 개별적 의지들의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자칫 유아주의로 빠지며 '소비적 자본주의' 및 그것과 짝을 이루는 국가의 전제국가화를 초래하는 경향성을 경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일상의 정치화는 그러한 작용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는 평소에 성매매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그 논거는 상호동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할 성행위가 자본이 개입함으로써 갑-을의 상하관계로 나누어져 강제적 성격을 띄기 때문입니다.
자본이 개입하지 않은 상황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상호동의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자본이 개입할 경우에 강제적 성격을 띌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것도 자본이 개입함으로써 갑-을의 상하관계가 생기고 강제성이 발생합니다만,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를 다수가 수용합니다.
귀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러한 기준은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합니다. 확률같은 요건들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합의하였을때 허용범위인지 아닌지의 판단근거로서 작용합니다.
박원순은 성폭력 피해자를 변호하는 일을 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평생 주창하던 신념은 피해자가 폭력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입니다. 박원순은 그가 저질렀던 행위를 피해자가 폭력으로 받아드렸으리라고 생각치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폭력으로 느낀 순간 자신은 성폭력범이라는것을 순응한것입니다.(박원순을 두둔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만,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주요한 요건이 될것입니다.
귀하께서도 말씀하신바와 같이 정당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고 정당의 역할범위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정치화가 절실하다는걸 자주 느낍니다.
오늘도 생각할 계기를 제공해주신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논의를 지속하면 할수록 그 해결책은 이와 같은 적극적인 의견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실천적 문제해결을 위한 밑바탕으로써 이 채팅이 대화의장이 되길 원합니다.
@leeverpool 지젝이 말하는 '소비주체'는 소비자본주의를 전제로 합니다. 소비자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본래적으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인공적으로 욕망의 향유를 창출하고, 무제한의 소비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체계입니다. 만약 상품이 시장에서 팔리지 못한다면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게 되고 공황과 불경기에 빠집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광고는 바로 그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유통' 부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생산보다도 소비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사회입니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일본기업 MUJI의 회장이 보드리야르의 이 책을 읽고 창업을 해서 성공했다고 하니 이 책이 얼마나 날카롭게 현실을 포착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습니다)가 말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 생산물'만'을 소비하지 않고 "기호" 자체를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이지 않은 소비랄까요? 상징과 기호를 소비하면서 그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모든 게 그렇게 "취향"화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는 모두에게 "향유하라! 그리고 즐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보편화된 게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시대라고 지젝은 봅니다. 지젝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이제 자본은 국가의 틀 안에 머물지 않고 전세계적 규모로 이동하고 국경을 없애버립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모든 '금지'의 원칙이 무너지고 자본이 제공하는 '향유'의 명령에 종속된 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지의 명령에서 향유의 명령으로 1970년대를 전후로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천박하게 말하자면 내가 내 취향대로, 내 마음대로, 내 돈 갖고 향유하겠다는데 니들이 뭔데? 알빠임? 이라는 주체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자본은 더 이상 막스 베버가 말했던 것과 같은 금욕을 통한 자본축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즐기고 더 많이 과시하고 더 많이 향유하는 주체를 원하며 개인의 무한한 '취향'을 보편화하죠. 한국으로 치자면 권위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학생운동권마저 무기력해진 뒤에 나타난 X세대와 그 이전 386세대 간의 차이랄까요?
그런데 이렇게 나타난 소비주체들은 '자기애적'인 성향이 강할뿐만 아니라 나약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글이 설명했으니 줄이겠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지젝은 어떤 주체성을 지향하는가? 그는 "진리의 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풍조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건 '취향'의 문제가 되어버렸지요. 지젝은 다시금 진리가 무엇인지 선언하고 결단을 내리는 정치를 원합니다. 그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배제된, 향유할 수 없는 주체들. 이른바 호모 사케르라 지칭되기도 하는 비주체들을 주체화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보편적인 주체를 창출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누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누군가의 향유가 누군가의 배제가 되는 이 기제 자체를 파기하고 보다 보편적인 주체 형성으로 나가야 한다는 게 지젝의 입장입니다.
흠, 알듯 말듯하죠? 사실 지젝의 한계는 비판과 달리 본인이 형성하고자 하는 게 뚜렷하지 않다는데서 나옵니다. 이럴 때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좌파들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말했던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나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는 문구를 끊임없이 인용합니다만 사실 약간 허망합니다. 비판, 안티테제로서 의미 있는 거니까요. 실천적 활동을 하다보면 무언가 나올거라는 그 막연함이 지젝의, 아니 현재 대부분의 좌파 이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현실적 차원에서의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의도는 이해합니다만,그것이 주권재민의 법칙보다 우선되서는 안될것입니다. 제도적 강제성이 어느정도 필요한것은 동의합니다만 애초에 인간사회에서 의견갈등의 완벽한 해소와 의견의 합치는 불가능한 일인데,사법제도의 강제성이 궁극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시는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갈등해결의 방법을 그런 차원에서 시도하시는것은 제도의 전제화가 될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가 공론장에서 '모든'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입법해야 한다고 주장한것은 사회제도가 개인의 의견보다 우선되서는 안된다는것, 개인의 자주성이 갖는 의미가 중대하다는 것을 얘기한것으로 이해합니다.
다소 비난이 거셌다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말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새롭게 되어야한다.는 독재를 향한 열렬한 투쟁의 필요성을 주창한것으로 이해합니다.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고 싶어 흥분한 것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맞습니다. 결국 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는가의 차원이 중요해지는데 저는 그것이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개인이 사회에게 강요하는 이중성을 지니는 방향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개인이 자신의 주장, 혹은 개별적인 의지를 '보편화'하며 사회에 강요하는 방향과 반대로 사회가 그것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보편화에 대항해 사회의 원리를 개인에게 강요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문제가 해결되리라 봅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는 두 의지 간의 대립이 '해결'을 보지 못하는 경우인데 그럴 경우에는 근대국가의 사법기구가 지닌 '폭력성'이 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소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좌파정당들은 자기 내부의 규율 원리를 근대 사법기구의 원리와 비교하면서 전자의 유용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근대국가와 경쟁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보편성 실현에 복무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젝의 글을 빌려 제가 논하고자 했던 점은 개별적 의지들의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자칫 유아주의로 빠지며 '소비적 자본주의' 및 그것과 짝을 이루는 국가의 전제국가화를 초래하는 경향성을 경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일상의 정치화는 그러한 작용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는 평소에 성매매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그 논거는 상호동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할 성행위가 자본이 개입함으로써 갑-을의 상하관계로 나누어져 강제적 성격을 띄기 때문입니다.
자본이 개입하지 않은 상황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상호동의가 이루어진 상황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자본이 개입할 경우에 강제적 성격을 띌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동을 하는것도 자본이 개입함으로써 갑-을의 상하관계가 생기고 강제성이 발생합니다만,현실적인 차원에서 이를 다수가 수용합니다.
귀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이러한 기준은 사회적 합의가 전제되어야합니다. 확률같은 요건들의 차이가 사회적으로 합의하였을때 허용범위인지 아닌지의 판단근거로서 작용합니다.
박원순은 성폭력 피해자를 변호하는 일을 해왔던 사람입니다, 그가 평생 주창하던 신념은 피해자가 폭력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입니다. 박원순은 그가 저질렀던 행위를 피해자가 폭력으로 받아드렸으리라고 생각치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폭력으로 느낀 순간 자신은 성폭력범이라는것을 순응한것입니다.(박원순을 두둔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만,개인이 어떻게 수용하느냐가 주요한 요건이 될것입니다.
귀하께서도 말씀하신바와 같이 정당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고 정당의 역할범위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정치화가 절실하다는걸 자주 느낍니다.
오늘도 생각할 계기를 제공해주신것에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논의를 지속하면 할수록 그 해결책은 이와 같은 적극적인 의견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실천적 문제해결을 위한 밑바탕으로써 이 채팅이 대화의장이 되길 원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의 보편화가 어떻게 자기애적 주체성을 만들게 되는지 그렇다면 지젝이 지향하고자 하는 주체성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