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런 빌어먹을 후손의 나라가 되었는가 - 우당에게 사죄하며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10/24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이 늑약이 알려지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비롯하여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늘로 대한은 망했다. 이 일을 어찌하는가.” 분노한 군중들이 종로를 메웠고 종로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했다. 어떤 이들은 도끼를 떠메고 대한문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을사오적을 죽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얀 얼굴에 반듯한 외모의 서른여덟의 남자가 이상재, 이동녕 등과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우당 이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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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오성과 한음 중 오성이었던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문중에 정승판서가 수두룩했던 ‘삼한갑족(우리 나라 역사를 통틀어 명문이라 칭할 수 있는 집안)’의 일원이었다. 명동성당 아래 일대의 땅을 모두 소유했을 정도로 거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살려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을사오적을 죽일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대한이 다시 ‘조선’으로 바뀌고 황제가 ‘이왕’이 되고 삼천리 강토가 일본의 치세에 들어갔던 1910년 12월. 50여 명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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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베고 지나가는 칼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잰걸음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 이들은 바로 이회영의 친족 일가다. 이회영과 그의 형 둘, 그리고 왕년의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요 과거에 급제해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동생 이시영 등 6형제와 이복형제 호영, 소영의 가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현금화한 뒤 만주로 건너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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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은 나라를 되찾을 항쟁의 터전을 마련할 요량이었다. 전답은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까지도 처분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제사냐’ 하는 심사였으리라. 일행 중에는 과거 이씨 가문의 노비였던 이들도 끼어 있었다. 노비문서를 불태운 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끝까지 옛 주인과 함께 하겠다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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