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된 인간학, ‘노동하는 동물’과 ‘소비하는 동물’ - 그람시의 '포드주의' 비판

실컷
실컷 ·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문화비평
2023/09/10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전도된 인간학, ‘노동하는 동물’과 ‘소비하는 동물’ - 그람시의 '포드주의' 비판

두고두고 회자 · 인용되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1936)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 찰리는 ‘컨베어 벨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등장한다.(알다시피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의 창시자는 포드였다.) 그는 하루 종일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는데, 직업병 때문인지 쉬는 시간에도 그는 조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 그를 그 곳에서 가장 ‘인간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것은 그만이 그러한 공장 시스템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이기 때문이며, 이 ‘기계-인간’의 행위가 역설적인 형태로 ‘기계/인간’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서는 찰리와 사장만이 보통의 체격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동물적’이다. 이런 ‘동물-인간’의 등장은 문제적인데, ‘동물인간’이라는 정의가 보여주듯이 그것이 ‘자연화’ 되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산업주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에게 있는 ‘동물성’의 요소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였다. 그 역사는 때로 고통과 유혈을 수반하기도 하면서 더욱 새롭고 더욱 복잡하며 더 엄격한 질서의 규범과 습관, 그리고 정확성과 엄밀성에 자연적(곧 동물적이고 미개한) 본능을 복속시키는 끊임없는 과정이었는데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산업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점점 더 복잡해지는 집단생활의 형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본능을 정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 들어간 ‘비용’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는 농촌 농노와 직인 노예의 최초의 형태들이 포함되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존재양식과 생활양식에서의 모든 변화는 잔인한 강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여 사회의 모든 생산...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익숙한 것을 오래 잘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려고 합니다.
245
팔로워 533
팔로잉 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