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226편 -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와 미하일 1세의 통치 시대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03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국민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Pozarski) 공작은 이듬해인 1613년에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젬스키소보르를 소집했다.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All free classes)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국민 의회는,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인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를 차르에 선출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출발시켰다. 이 때는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조선 왕조에 해당하고 광해군 시기로 생각된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이반 Ⅳ세의 첫 번째 황후의 오빠의 손자이다.
사진 :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가계표, 사진출처 : Династия Романовых - история, особенности и интересные факты By, Афанасьев Юрий

그는 최고 통치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즉위와 더불어 그동안 폴란드에 인질로 잡혀 있던 부친 필라레트 로마노프(Filaret Romanov)가 돌아와 1613~1633년의 기간에 공동차르(Cotsar)로 선언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국민군과 그리고 비교적 광범위한 계층의 이익을 대표한 국민 의회에 의해 탄생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국민과의 협조를 통한 통치보다는 모스크바 대공국 때 굳어진 전제 정치에 의존했다.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개최되었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 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치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그 왕조 탄생의 토대로 자리 잡았던 국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 속에 있지만, 모스크바 귀족 가문 중의 하나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러시아연대기』에 따르면 로마노프 가문의 선조는 ‘코빌라(암말)’ 라는 별칭을 가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Andrei Ivanovic)이다. 

그는 1347년 벨리키 블라디미르 및 모스크바 공후였던 시메온 이바노비치 고르디(Simeon Ivanovic Gordi)를 위해 봉직한 인물이었다. 그의 후손인 표트르 니키티치 자하린(Piotr Nikitic Jaharin),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Milkail Piodrvic)의 부친인 총주교 필라레트(Pillaret)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이름과 부칭에서 ‘로마노프(Romanov)’라는 성(姓)을 정한 것에서 로마노프 가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노프 가문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 류리크 왕조의 인척이 되면서부터이다. 1547년 로만 유리예비치의 딸 아나스타시야 로마노브나 자하리나(Romanov Jaharina)가 이반 4세의 왕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류리크 왕조가 절멸하고 왕위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로마노프 가문은 왕권 경쟁의 후보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613년 필라레트의 아들 미하일 표트르비치 로마노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전제군주제의 기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섭정이나 측근 정치에 의존하는 시기도 있었고, 재능 있는 인물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궁극적으로 모든 국가 사안은 군주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군주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라 국가 발전의 행로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제정이 가지는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모든 계층의 구성원들이 ‘아버지 차르’의 권위주의적 지배에 의지하는 가부장적 국가형태가 조성되었다.

전제정치와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정치 체제를 지탱한 것은 관료제였다. 거대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주를 위해 복무할 관료들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전제정의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다. 이들 귀족 관료들의 부패와 피지배 계층과의 갈등은 원활한 국가 통치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따라서 개혁의 시기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행정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졌다. 왕조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효율적인 관료제 확립은 국가 발전의 필수적 요소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 당시 러시아의 영토는 유럽러시아 지역과 예니세이 강 서안의 서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 초기의 대외 정책은 이른바 ‘동란 시대’로 알려진 폴란드-스웨덴과의 전쟁과 침략으로 함락된 북서부 지역의 영토 회복과 남부 국경 지대의 국방력 강화에 집중되었다. 초기 통치자들은 군사력 강화 정책을 통해 스웨덴, 폴란드에 대항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반면, 시베리아의 식민지 개척은 성공적으로 이끌어 상당한 영토 확장을 이루어냈다.

한편 이러한 로마노프 왕조가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 확보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북서부의 스웨덴, 서부의 폴란드, 남부의 오스만투르크와의 관계는 러시아 대외 정책에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였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는 이러한 문제들을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러시아를 유럽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 1세는 오스만투르크,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아조프 해 연안 지역과 잉구리야, 카렐리야 일부, 에스트란디야(Esttandia), 리플란디야(Liplandia) 지역 등 러시아 북부 및 발트 해 연안 지역을 병합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 2차 투르크 전쟁의 승리로 흑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고, 세 차례의 폴란드 분할에 참여함으로써 벨로루시 및 발트 해 지역의 영토들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東) 그루지야(1801년), 핀란드(1809년), 베사라비야(Besarabia, 1812년), 아제르바이잔(1813년), 폴란드 왕국(1815년)을, 알렉산드르 2세는 중앙아시아, 북카프카스, 극동, 바투미 등을 병합했다. 로마노프 왕조가 존속했던 300여 년 동안 러시아는 지속적인 영토 확장으로 발트 해와 흑해로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종교적인 부분으로 볼 때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은 이래로 정교회는 모든 러시아 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일상의 관습에서부터 교육, 문학, 예술들, 특히 회화, 건축, 음악, 정치에 이르기까지 정교회는 로마노프 왕조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전제 체제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요소로서 정교회를 특별히 중요시하며 통치의 기제로 활용했다. 특히 차르였던 알렉세이(Alexei) 시대에는 니콘의 교회 개혁 과정에서 교권에 대한 세속 권력의 우월성을 확인했고, 표트르 1세는 신성종무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이었던 교회 행정 체계를 정부산하 기구로 편입시켰다. 교회와 그 수장인 총주교의 권위를 세속 권력에 복속시킴으로써 군주의 위상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실질적인 정교 왕국이자 간접적인 제정일치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전개 과정에서 러시아는 평화적 교류나 물리적인 충돌을 통해 다양한 이민족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유입된 타 문화의 요소들이 고유의 슬라브적 문화를 기반으로 융합됨으로써 러시아 문화는 더욱 풍성해졌다. 의식주의 물질적 요소에서부터 언어나 관습의 제도적 요소, 종교적 관념과 가치관의 정신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융합의 흔적들은 현대 러시아의 삶 속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수입된 서구의 문화는 러시아의 토양 속에서 새로운 전형을 창조해 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이러한 성과는 문화 예술의 강국으로서 러시아의 위상을 높였으며 역으로 모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어 다른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로 이어지는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 스타니슬라브스키와 체호프의 사실주의 연극 미학, 디야길레프의 러시아 발레, 말레비치와 칸딘스키, 샤갈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은 로마노프 왕조의 탁월한 문화적 성취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로마노프 왕조가 서유럽 가문과의 혼인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는 차르 미하일 1세의 통치 시기였다. 차르의 부친 필라레트는 국제정치 속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덴마크, 스웨덴 등 북유럽 왕가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로의 개종을 결혼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실제로 서유럽, 북유럽 왕실과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 러시아와 스웨덴 간의 북방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표트르 1세는 외교를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한 후 쿠를리안디야(Kurliandia)로 알려진 지금의 라트비아 서부 지역, 게르만 계 공국들을 점령하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표트르 1세와의 회동을 통해 러시아의 팽창을 막으려 했다. 

그리하여 표트트 1세와의 회동을 요청했고, 1709년 10월 마리엔베르데르(Marienberder)에서 만난 두 군주는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약정하고, 그 증표로서 왕실 간의 혼인을 합의하게 된다. 이에 따라 1710년 10월 프로이센 왕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표트르 1세의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둘째 딸 안나(Anna)의 혼인이 이루어졌다. 안나의 언니 예카테리나도 국익의 차원에서 독일 메클렌부르크(Meclinburg) 시베린(Siberin) 공국의 카를 레오폴드(Karl Leopold)와 1716년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브라운시베이크(Brawnsibeik) 공후 안톤 울리히(Antonio Julichi)와 결혼하여 이후의 러시아 모스크바 공국의 차르 이반 6세를 낳았다. 표트르 1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와 딸 안나도 서유럽의 유력 가문과 혼인시켰다. 

첫째 부인 예프도키야(Yevdokiya)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세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6세의 처제인 브라운시베이크 공녀 소피아(Sopia)와 1711년 결혼했다. 이들의 아들은 1727년 표트르 2세로 러시아 황제에 즉위했다. 두 번째 부인 예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안나는 스웨덴 왕 카를 12세의 조카인 독일 고르시테인(Gorsitein) 고토르프(Gotorv) 공후 카를 프리드리히(Karl Pridrichi)와 1725년 결혼했다. 이처럼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유력 가문과의 혼인은 18세기에 집중적으로 성립되었다. 이것은 로마노프 왕조가 유럽의 유력 혈통 속에 용해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남성 직계는 1730년 표트르 2세 사후 단절되었다. 후계와 연관된 정치적 위기 상황 속에 이반 5세의 후손들이 제위를 계승했다. 이반 5세의 딸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1730~1740)와 증손자 이반 6세(Ivan VI, 1740~1741)의 재위 기에는 브라운시베이크 가문의 대리인들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통치했다. 1741년 러시아 내부의 정변으로 인하여 제위는 표트르 1세의 후손들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직계 후손들을 가지지 못한 표트르 1세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beta Petrovna)는 제위를 자신의 조카인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공국의 표트르 3세에게 물려주었다. 고르시테인-고토르프 가문은 덴마크 올덴부르크(Oldenburg) 왕조의 직계로 표트르 3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로마노프의 러시아 제위를 계승했다. 19세기에도 로마노프 왕조의 유럽 명문 가문과의 혼인 전통은 계속되었다. 

파벨(Pavel I) 1세는 뷔르템베르크(Biltemberg) 공국, 알렉산드르 1세는 바덴(Baden) 공국,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 왕국, 알렉산드르 2세는 게센(Gesen) 공국, 알렉산드르 3세는 덴마크 왕국, 니콜라이 2세는 게센 공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들 가문과 인연을 가지게 됨으로 인해 로마노프 왕가는 유럽 여러 가문들과 혼혈된 가문으로 점점 그 순수혈통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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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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