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려간 개운죽에게 식집사가 미안해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12/07


생명을 보살피는 일을 무겁게 여긴다. 그래서 동물을 장기간 키운 적이 없다. 형이 주워온 병아리들이 하루만에 죄다 죽어나가는 참사를 본 적도 있고 금붕어를 페트병에 담아 이틀 쯤 놔뒀다 어디로 보내는 모습도 봤으며 아버지가 직장 근처에서 데려온 개를 집 앞에 이틀 쯤 묶어놓은 적도 있으나 내가 책임을 진 적도 없고 정이 들만큼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런 이유가 있어선지 나는 방에서 식물조차 키우지 않는 메마른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때까지는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 터라 좋고 싫고도 없었고 생활의 풍경이 메마른 건지 촉촉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 몇 년 전 작업을 하러 도서관에 다니다 생각이 살짝 바뀌었다. 과도하게 크고 깔끔해서 환경 재난으로 망해버린 인류의 마지막 벙커처럼 삭막해 보이기 직전이던 그 도서관 곳곳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이용자의 정서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물을 채운 아크릴 상자에 키우던 개운죽은 말끔하고 청량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나도 저걸 좀 키워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날 마음먹고 개운죽을 열 뿌리 주문했고, 도착한 그것들을 집에 있던 물병 둘에 나눠 꽂고 책상 좌우에 놓았다. 가로로 긴 통에 일렬로 꽂아서 대나무숲처럼 시원한 느낌을 더 주면 좋았겠지만 기다란 통을 구하기 어려워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것만으로 내 책상은 새까만 화면과 잡동사니로 가득한 미치광이 발명가의 작업대가 아니라 생기있는 삶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대기업 사무실에 가면 에어컨 바람을 가리는 용도인지 커다란 초록색 바나나 잎 같은 장식들이 자리마다 놓여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보다 훨씬 보기에 좋았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데 문제를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개운죽은 그냥 물을 주고 종종 물을 갈아주거나 너무 길어진 뿌리를 잘라주는 것 말고는 아무 관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잘 자랐다. 40센티 정도의 길이로 자랐기에 나는 주워온 화병으로 분갈이를 해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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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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