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트킹의 아버지 고유성 선생의 명복을 빌며
2023/04/14
나의 ‘인식의 지평’을 개막시켜 준 것은 뭐니뭐니해도 만화였다. 박정희 작사 작곡의 ‘백두산에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나의 조국> 가사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노래가 끝난 후 펼쳐지는 어린이 시간대를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날아라 태극호>니 <이겨라 승리호>니 하는 일본 수입 애니메이션으로 나는 한국어 보캐뷸러리의 지평을 넓혔고 정의와 악당의 개념을 이해하게 됐다.
.
TV 뿐이 아니었다.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같은 책은 나에게 나라 밖 세상과 세계사에 대한 호기심을 깊숙이 심어줬던 작품이었다. 국제 마약 거래, 히틀와 나치, 스페인 내전, 유로코뮤니즘, 프랑스 혁명 그 모두를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에서 처음 접했다. 또 예나 지금이나 철저한 ‘문돌이’로서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자연 과학 분야에서 대개 엉터리일망정 그럴싸한 과학적 상상을 하게끔 만들어 준 ‘공상과학만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고유성 선생의 <로보트킹>은 나에게 꽤 압도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다.
.
이사하면서 꽤 많은 책 정리를 했다. 아마 5백권 정도는 버리거나 후배에게 주거나 중고서점에 폐품값 받고 넘겼을 것이다. 그 가운데 옛날 만화 애장판(?)을 두 질 발견했다. 하나가 김혜린의 걸작 <북해의 별>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로보트킹>이다. 2000년대 초반 딴지일보에서 복간을 추진한다는 말을 듣고 아리까리 넘겼다가 몇 해 전 로보트킹 전체가 다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마누라의 괄시와 지갑의 허전함을 무릅쓰고 질러 버린 결과물이다.
.
다시금 추억의 세계로 돌아가 로봇킹 탄생부터 시간 여행까지 총 13권을 들추며 내내 아쉬웠던 것은 판형이 작다는 것이다. 왕년에 만화방에서 탐독했던 로보트킹은 16절지 크기는 족히 넘는 크기였고 그림도 훨씬 시원시원 커 보였기에 그림체의 감칠맛이 다채로웠던 것이다. 그래도 머리 속에만 있던 추억의 그림들을 다시 손으로 들추며 보는 기쁨은 어디 가지 않는다. 한때 아주 잠깐 페이스북 프로필로...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로망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