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무스 교수의 '대안현실'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2/24
악당들의 현실인식
소설과 영화, 심지어 논픽션까지 '이야기'의 형태를 지닌 대부분의 장르에서 악당은 매우 중요하다. 대립하는 악당이 충분히 도드라지지 않으면 주인공의 매력도 빛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미니무스 교수는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니무스 교수는 하얀 머리카락, 작지만 단단한 체구, 빠진 송곳니를 일부러 채워넣지 않은 치아처럼 '유능하고 괴팍한 명의'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으나 실제로는 그와 대척점에 있다.

우선 이틀에 한 번씩 도는 '응급실 아침회진'을 제외하면 환자를 마주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아침회진'조차 '의사놀이'에 가깝다. 응급실에 상주하는 내과 2년차 레지던트와 응급실 인턴들이 대부분의 환자를 담당하고 '도착 당시 사망'인 환자의 시체검안서 작성, 생존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사례에 해당하는 환자의 심폐소생술 따위가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하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레지던트가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노력하면 미니무스 교수를 포함한 응급의학과 의국 전체가 반대했다.) 그러니 응급의학과 레지던트들은 자기네가 전혀 진료하지 않은 환자들을 미니무스 교수에게 보고했고 원래도 무능했으며 오랫동안 환자를 진료하지 않아 더욱 무능해진 미니무스 교수는 응급실을 돌며 '명의 행세'를 즐기면서 온갖 이상한 말을 환자와 보호자에게 건넸다. 퇴원시킬 환자에게는 '책임지고 입원시키겠다', 입원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대학병원에서 입원할 질환이 아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약물치료로 충분하다', 약물치료로 층분한 환자에게는 '응급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선고(?)했다. 그리고는 아침회진이 끝나면 의국회의실에서 스포츠신문을 정독하고 미니무스 교수만큼이나 무능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친규교수들'과 담배를 피우며 수다를 나눈다. (2000년대 후반에도 병원은 법이 정한 금연구역이었다.) 그러다가 직원식당 혹은 병원 근처 복어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연구실에서 골프채를 들고 '숏퍼팅'...
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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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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