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냐 가족이냐
2024/03/25
가족의 삶은 State에 의해 지탱된다. 때문에 가족은 살아남고 유지된다. 사람들은 가족적 삶으로 돌아간다. 가족적 삶은 “인간의 도리”이며 “인지상정”이며 어떤 안정성을 제공해주고, 위안을 주고 불안을 제거해주고, 시세인심에 부합한다. 상식에 부합한다. 튀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보통의 삶을 위해서라도, 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래도, 전망도, 길도, 다 그곳으로 이어진다. “결혼 막차”를 안간힘을 써서라도 타려하는 것이 다 그 때문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이다. 마당패탈을 했던 사람들조차, 모두 언제까지나 동아리에 머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다른 삶을, 또 다른 삶의 모드를 취해야 한다고 예감한다. 동아리의 삶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은 “가족”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은 꾸려서 무슨 사업을 벌이기 위해 꾸리는 것이 아니다. 마당패탈은 문예운동을 위해 꾸린 것이다. 놀랍게도, 가족은 개개인의 가장 절실한 문제들, 개개인의 자기표현들, 자유, 사랑 같은 것에 반드시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 부모는 자식이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 사회인으로 모나지 않게, 모나더라도 적당히 모나게, 생활해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반드시 자신의 노후대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식의 자유와 사랑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되곤 한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자식의 “평범한 삶”,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부모로 하여금 자식을 심지어 군대에까지, 전쟁에까지 내보내게 한다. 다들 가니까. 갔다와야 사람 구실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State가 가족의 존속을 보장하고 또 요구한다. 거기서 벗어나면 비참한 말로가 기다린다. 가족의 수호자가 된 부모들은 살아남아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고 전해지는 어떤 전설 같은 이야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