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배이 이야기
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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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옆에 괘방령(掛榜嶺)이라는 곳이 있다.
옛날 과거 보러 오가던 선비들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그 고개를 피해 다닌 길이 괘방령 — 장원급제 방을 받을 수 있는 고개 — 이라고 한다.
그 고장 사투리로는 ‘개배이’라고 한다. 괘방령이 개배이가 되기까지도 흥미로운 언어학적 고찰 대상이겠으나 여기서는 내 할아버지 대의 가족사 얘기를 해 볼까 한다.
할아버지는 1920년생이고 아래로 여동생 하나만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내 증조할아버지는 어려서 학질을 앓아 눈이 멀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총명해서 앞을 못 보는 채로 글을 익혔다고 한다. 글을 익혔다기보다는 주역이며 점술서들을 통째로 외웠다고 하더군.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손자를 앉혀놓고 천자문을 가르쳤다고 해. 소경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한문를 가르치는 모습은 상상하기가 어려운데 글자의 모양이며 유례와 뜻을 세세하게 알려주고 동몽선습 같은 책은 몇 번째 장 몇째 줄에 어떤 내용이 있다는 걸 척척 알려주었다고 하네.
증조할아버지는 역시 소경인 아내를 맞아 해로했고 점을 봐주는 걸로 연명했다고 하더군. 아이 여럿을 낳았으나 다 잃고 오누이만 남겼단다. 왜정 때, 빈한한 산골에서 장님 부부의 아들딸로 태어난 할아버지 오누이의 고생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렵겠지. 할아버지가 열 살 때 고조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단다. 철없는 여동생 하나와 앞 못보는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열 살 사내아이는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행히 증조할아버지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점을 봐주는 일로 벌이가 나쁘지는 않아 아이들을 굶기지는 않았고 징용에 끌려갈 일도 없었겠지.
해방 되던 해에 고모할머니는 열여섯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고운 자태였으니 얼마나 예뻤겠나. 증조할아버지의 점궤 때문이었는지 어떤 사정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해방되기 얼마 전에 고모할머니를 시집보냈단다. 오빠는 아버지 명에 따라 초라한 살림보따리를 꾸려주었을 것이고 야무진 열여섯 여...
세상을 선과 악, 흑과 백으로 갈라치는 단순무식함에 놀라고
자기는 늘 선하고 순결한 편에 속한다는 용감무쌍함에 기가 질린다.ㅗ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