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사이에서
2024/04/18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물음은 항상 존재했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 이야기가 결말 없이 길게 이어져 왔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눈을 뜨면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는 사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빛나게 하고 무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빛내려고 집안에 사물이 늘어난다. ...
@끄트머리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이윤희 시인
고맙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김인걸
사는 일이든 예술이든 결국 사물과의 관계인데, 사물의 외형과는 볼도로 사물의 작동 방식, 인간과 닿았을 때의 반응 방식을 의미로 만들어 두어야 할 겁니다.
문학이나 예술의 심미적 의미화도 있을 테고 물리적 의미화도 있을 테고, 화학적 의미화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화가 각자에게서 일어나며 '삶'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리, 실, 도화지의 등장이 그런 의미화의 과정의 이름이 되겠네요. ^^
고맙습니다!
@천세진 님의 사물에 대한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사물에 속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물에 속하기도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사이에 있는 시간은 우리를 이어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그 두 가지가 구분될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실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사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큰 도화지에 "자연"이라는 배경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자연이란 것도 어쩌면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느끼기에 오감으로 가장 와 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퇴근 길에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을 한 번 의식하면서 가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K Min
두 번째 산문집의 발문에 해당하는 글인데, 손도 좀 보고 읽으시는 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었는데, 반가운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성훈
사유의 진경을 시와 에세이를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제 화법인데, 결국 사상가들의 이야기 하나를 다르게 말하기가 되는 셈이지요.
가시, 비가시가 하나로 묶여 이해되는 것이 사물과 인간이니, 언어가 색 칠하기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마침 퐁티의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를 읽는 중입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비교적 읽기 쉬우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삶과 생활에 임하는 자신의 태도와 방식을 한번쯤 돌이켜 보게 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양질의 문학 에세이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은근히 여운이 남는 글이라 맘에 듭니다.
메를로-퐁티의 예술론으로 가면, 예술(철학도 포함한)로 인해 보는 것(vue)과 보이지 않는 것(invisibilité)의 틈을 메꾸는 것이죠. 즉 보이지 않는 것은 표현됨으로 인해 보여지는 것(vu)이 되고, 이 틈을 메꾸는 존재론적 원소를 살(살갗, flesh)이라고 함으로써 우리 사람들에게 해석과 의미를 낳는 것이 바로 예술, 철학, 문학, 시로 불리어지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살이라는 메타포는 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손을 맞잡음이니까 이 손을 맞잡게 해주는 것,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김인걸
사는 일이든 예술이든 결국 사물과의 관계인데, 사물의 외형과는 볼도로 사물의 작동 방식, 인간과 닿았을 때의 반응 방식을 의미로 만들어 두어야 할 겁니다.
문학이나 예술의 심미적 의미화도 있을 테고 물리적 의미화도 있을 테고, 화학적 의미화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화가 각자에게서 일어나며 '삶'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리, 실, 도화지의 등장이 그런 의미화의 과정의 이름이 되겠네요. ^^
고맙습니다!
@천세진 님의 사물에 대한 관점이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사물에 속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물에 속하기도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사이에 있는 시간은 우리를 이어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그 두 가지가 구분될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실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저는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 사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큰 도화지에 "자연"이라는 배경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 자연이란 것도 어쩌면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느끼기에 오감으로 가장 와 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퇴근 길에 보이는 사물과 보이지 않는 사물을 한 번 의식하면서 가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성훈
사유의 진경을 시와 에세이를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제 화법인데, 결국 사상가들의 이야기 하나를 다르게 말하기가 되는 셈이지요.
가시, 비가시가 하나로 묶여 이해되는 것이 사물과 인간이니, 언어가 색 칠하기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마침 퐁티의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를 읽는 중입니다.
좋은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비교적 읽기 쉬우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삶과 생활에 임하는 자신의 태도와 방식을 한번쯤 돌이켜 보게 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양질의 문학 에세이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은근히 여운이 남는 글이라 맘에 듭니다.
메를로-퐁티의 예술론으로 가면, 예술(철학도 포함한)로 인해 보는 것(vue)과 보이지 않는 것(invisibilité)의 틈을 메꾸는 것이죠. 즉 보이지 않는 것은 표현됨으로 인해 보여지는 것(vu)이 되고, 이 틈을 메꾸는 존재론적 원소를 살(살갗, flesh)이라고 함으로써 우리 사람들에게 해석과 의미를 낳는 것이 바로 예술, 철학, 문학, 시로 불리어지는 거라고 볼 수 있죠. 살이라는 메타포는 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손을 맞잡음이니까 이 손을 맞잡게 해주는 것,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