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그 경계
2022/02/22
경계에 선 인간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경계 밖의 두 세계로부터 항상 다른 영향을 받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나고 자란 진영읍이라는 공간은 부산과 마산(일제강점기 당시, 영남지방 최고 무역도시)를 잇는 중계 도시와 농촌이라는 경계에 선 장소였다.
광복 이후, 진영은 좌익 세력의 주활동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경계에 선 지역이라는 특성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공산주의 이념의 주축이었던 농촌의 특성과 이념의 확산을 위한 자본가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몇 개 없던 역을 가지고 있던 농촌으로 많은 자본과 사람이 오가고 또한, 그 자본가들과 농민들 간의 갈등의 골이 깊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뿌리내리기 좋은 지역으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그런 경계에 선 지역은 그 자체로서 큰 곤역을 겪어야 했다. 무엇이 좋은지 판단을 내리기엔 그들은 너무 무지했고, 또 정부는 무능했다. 결국 이념갈등이 심해지고 6.25전쟁 이후 반공 심리가 강해진 이후, 진영읍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진영장터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정태를 포함한 300명이 학살되고, 200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모두 보도연맹으로 몰...
광복 이후, 진영은 좌익 세력의 주활동지가 되었다. 그 이유는 경계에 선 지역이라는 특성이 큰 영향을 미쳤는데, 공산주의 이념의 주축이었던 농촌의 특성과 이념의 확산을 위한 자본가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몇 개 없던 역을 가지고 있던 농촌으로 많은 자본과 사람이 오가고 또한, 그 자본가들과 농민들 간의 갈등의 골이 깊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뿌리내리기 좋은 지역으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그런 경계에 선 지역은 그 자체로서 큰 곤역을 겪어야 했다. 무엇이 좋은지 판단을 내리기엔 그들은 너무 무지했고, 또 정부는 무능했다. 결국 이념갈등이 심해지고 6.25전쟁 이후 반공 심리가 강해진 이후, 진영읍에서는 피바람이 불었다.
진영장터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정태를 포함한 300명이 학살되고, 200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모두 보도연맹으로 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