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china21
allchina21 · 사마천 ‘史记’ 연구자
2024/01/03
011-6. 곧은 붓, 휜 붓
직필(直筆)과 곡필(曲筆)
출처: 선데이저널

남은 이야기 2: ‘역사는 그 자체로 뒤끝이다’
청나라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장원급제한 항주 출신의 한 젊은이가 송나라 때의 명장 악비(岳飛)의 무덤인 악왕묘(岳王墓)를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하는구나.

1141년 명장 악비가 풍파정(風波亭)에서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하고도 약 600년이 지난 청나라 때 장원급제한 젊은이가 어째서 악비의 무덤을 찾아 이런 시를 읊었을까? 이 젊은이는 다름 아닌 그 당시 악비를 모함해 죽이는데 맨 앞장을 섰던 간신 진회(秦檜)의 후손 진간천(秦澗泉)이었다. 진간천은 악비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역사의 대간신이자 자신의 조상인 진회의 부부상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이런 글로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전했던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뒷끝이다. 충신 악비는 처형당했고, 간신 진회는 부귀영화를 누리다 잘 죽었지만 역사는 진회의 죄상을 잊지 않고 있다가 결국은 그 부부의 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다 무릎을 꿇려 놓았다. 영원히 그 자리에서 악비에게 사죄하고 역사에게 사죄하고 민중에게 사죄하라는 엄벌인 셈이다. 역사의 법정에서 공소시효란 있을 수 없다.
악비의 무덤 ‘악왕묘’(출처: 김영수)
소흥(紹興) 3년(1133) 악비는 대군을 이끌고 빼앗긴 땅과 성을 차례로 수복하여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선진(朱仙鎭)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금나라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부장마저도 악가군(岳家軍)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금나라의 장수 금올술(金兀術)은 싸울 의욕을 잃고 그저 안전하게 북방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사마천의 ‘사기’ 공부를 통해 중국 역사 문화와 중국 중국인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
105
팔로워 29
팔로잉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