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高地)를 좋아했던 시인을 신장식 변호사 덕에 떠올리다.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4/03/04
고지(高地)를 좋아했던 시인을 신장식 변호사 덕에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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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이야기로 누군가 암송할 수 있는 시를 대 보라고 하면 머리를 긁는다. 윤동주의 <서시> 정도나 경우 기억할까 나머지는 ‘대충’ 얼개만 읊을 뿐 시인들이 갈고 닦은 빛나는 말 조각들을 좀체 꿰지 못한다. 그런데 시조는 좀 예외다. 지금 앉아서 되는 대로 써 보라고 해고 스무 수는 넘게 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형(正形)이 있으니 노래하듯 읊을 수 있고 그를 머리 속에 담기도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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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들의 나라가 조선이 망한 뒤 다른 구시대의 유물들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에 속하던 시조가 부활한 것은 일종의 ‘반동’이었다. 계급 문학론을 깃발로 내건 KAPF와 맞서면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듯 시조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것이다. 시발은 최남선이었고 판은 가람 이병기가 깔고 깨끗이 쓸었다. 그 판에서 화려하게 자신의 문재를 뽑낸 이 가운데에는 노산 이은상도 있었다. 
 본디 그는 시조가 문학이 아니라고 경멸한 적이 있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런데 시조 논의를 통해 그 가치를 이해하게 되면서 “시조도 문학이 될 수 있겠다”고 사고의 전환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명 시조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 가곡의 톱클래스 명곡에 들어가는 <가고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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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상은 양주동과 단짝이었다. 자칭 대한민국 국보 1호라고 할만큼 그 자존심이 성층권에서 놀았던 양주동이나 글로는 누구한테도 안진다고 생각한 이은상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일본 유학도 때도 한 하숙집에 살았던 사이였고 한문과 고전에 능통했다. 서로가 시조를 지으면 그걸로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서로의 재능을 인정했던 사이라고나 할까. 이런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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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 유학 시절 스스로 천재라는 믿음이 굳건했던 양주동은 별 것도 아닌 듯한 이은상이 “나도 너만큼 천재야.”하고 뻗대도 무시했다. 감히 네가 무슨 천재냐...... 그런데 어느 날 이은상이 구름을 소재로 시 한수를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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