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8
직장에서 꼭 에어팟을 끼고 근무해야 하나요? 안된다고 확정지어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질문은 역으로 해보고 싶긴 하네요.
지금은 과거의 화려했던 성장을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유례없는 급격한 성장을 이룬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세대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 있을까 싶은데요. 20대부터 50대, 확장해서 60대까지 함께 일하는 회사라는 전제입니다.
각각 나라가 후진국이던 시절, 개발 도상국이던 시절에 청춘을 보냈던 세대도 있고, 지금의 선진국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세대도 함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영향도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던 만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각의 차이도 크다고 보구요. 태어나면서부터 선진국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
지금은 과거의 화려했던 성장을 논할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유례없는 급격한 성장을 이룬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세대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 있을까 싶은데요. 20대부터 50대, 확장해서 60대까지 함께 일하는 회사라는 전제입니다.
각각 나라가 후진국이던 시절, 개발 도상국이던 시절에 청춘을 보냈던 세대도 있고, 지금의 선진국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는 세대도 함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영향도 꽤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던 만큼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각의 차이도 크다고 보구요. 태어나면서부터 선진국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
가지고 있는 것, 아는 것이 부족해도 주변을 챙기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길을 꾸준히 걸을 수 있도록 응원 부탁합니다. 저도 아는 모든 분들의 앞날에 광명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댓글 감사합니다.
어디 편을 드려는 게 아니고 거시적 관점입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은 궤가 다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본과 같은 삼단논법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A=B이고 C=A이면 C=B이다.
너무 쉽지만, 논리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엄밀하게' 쌓아가기 위해 절대 이를 무시하지 않고 중시한 겁니다.
피타고라스 역시 수학자로서 "증명"을 중시했고요. (반면 중국인들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우연히 발견하고도 증명하려는 노력없이 활용만 중시)
이들은 자연을 논리적 규칙으로 이해해 진리를 알고자 했습니다.
유럽은 중세의 암흑을 겪었으나 근대의 계몽주의 - 합리주의의 등장은 이를 더 부채질합니다.
동양철학은 제자백가의 중심인데 서양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백가는 정치적 견해를 띄었습니다.
고대 유럽이 '자연의 진리'를 원한 것과 배치되죠.
제자백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공포를 통한 욕구의 통제.. (법가)
인의예지신.. (유교)
서양철학에서는 심리는 논리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로 보고, 다양하게 이야기할지언정 특정 견해에 대한 확언을 자제했습니다. 증명/실증하기 어려운 점을 짚은것이죠.
'물처럼 살라' 는 노자 처럼 '도' 사상과 결합하기도 했는데요. 초월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반면 플라톤도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이데아를 추구하였으나 그는 '물처럼 살라' 와 같이 독자에 따라 해석하기 어려운 주장은 자제했습니다. 훨씬 명료한 논리를 추구했습니다.
예컨데 동굴의 우화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지하 동굴에 죄수가 갇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묶인 채로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하여 머리를 움직일 수도 없다. 그의 등 뒤 위쪽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죄수는 횃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
이렇게 우리가 보는 세상이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허황되다 느낄지언정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뜻하는 바가 명확하거든요. 이는 데카르트의 주장과 매트릭스(시뮬레이션 이론) 과 같은 영화까지 이어집니다.
장자는 호접지몽으로 플라톤과 유사한 주장을 했으나, 그의 사장이 노자와 같이 굉장히 보편적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사람마다 해석이 다름), 엄밀한 논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MZ 세대는 역사상 가장 서구 철학에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합리성, 논리 위주의 교육/문화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증명", "입증", "합리", "이성" 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무교" 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런 영향 아닌가 합니다.
남들이 어떻든 간에 내 개성과 독립적인 생각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선 교수가 수업서 배운 기존 이론을 지지해서 리포트 쓰지 말고, 반박하는 입장이 되어보라던지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비판(critical thinking) 이 중시되고, 다수가 주장해도 본인이 납득되지 않으면 이에 동조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반면 이보다 조금 더 전 세대는 전통적인 공동체 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데 조금 납득되지 않아도 부드러운 해결을 위해 순응하는 것이죠.
이 순응의 기준에서 수직적 문화의 영향도 훨씬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구요.
그래서 인간관계적인 부분으로 문제 해결하려는 경향이 다소 있어 보입니다.
"꼭 이어폰을 사용해야 하나요?" 라는 물음은 "이유야 어떻던 우리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양보하며 잘 풀면 좋지 않을까?" 와 같은 취지가 담겨 있어 보입니다. 헌데 MZ 세대 입장에서는 "왜 이어폰 끼는게 좋지 않은지 이성적으로 납득" 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는데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꼰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중심 시각이 다른 것이죠.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중심이었습니다.
개인 사상이나 취향적인게 다양했죠. 해서 세세한 이유로 개인 자유를 제약하면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개인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도 어려운 일이죠.
해서 과정이야 어떻든 성과주의를 택했습니다.
일단은 터치하지 않고 지켜봅니다. 업무시간에 이어폰을 끼던 잠시 게임을 하던 인터넷 서핑을 하던 산책을 하던 뭘 하던지 말이죠. 그리고 나서 성과가 안좋다 싶으면 깔끔하게 해고합니다. 자유주의라서 노동법도 해고하기가 좋죠. 하루아침에 해고가 가능합니다. 물론 당일해고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며칠 전이라도 이야기하는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은 있습니다. 하지만 의견이지 비난은 아닙니다. 최근 트위터 같은 경우는 1) 관리자나 동료에게 통지하지도 않고 갑자기, 2) 대규모의 인원을, 3) 잘못된 계산으로 (나중에 일부 돌아오라고 함), 4) 엉망인 프로세스로 해고하여 문제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당일 해고가 그렇게 비난받는 문화는 아닙니다.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 화내는 사람은 있으나 정당성에 대한 항변보다는 "울분"으로 간단하게 해석됨)
이때 해고 기준은 대개 1) 관리자 마음 2) 평판 입니다.
이때 이 평판이라는 것은.. 우선 다른 직원에게 불편한 게 있으면 딱 한 두마디만 하고 꾹 참습니다.
예컨데 A라는 사람이 B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합시다.
이어폰 때문에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직접 쳐야 해서 불편하다는 등이죠.
그럼 A 는 "이러저러해서 불편한데, 수정 가능해요?" 물어봅니다.
B는 "전 이렇게 해야 일이 잘 되어서요. 너무 큰 문제라고 생각되면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할게요" 라 했다고 합시다.
그럼 A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꾹 참습니다. 참는다기보다는 한동안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다시는 이어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상대 직원의 성과가 좋으면 능력은 순순히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이어폰에 대해서 앞으로도 쭉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과 좋은 사람을 상대로 행동거지를 선 넘어 지적하다가 지적한 쪽이 해고당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성과가 별로 같으면 관리자에게 성과도 낮은데 이런저런 (이어폰 등) 불편함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관리자는 이런 불만이 일정 이상 많이 나오면 해고합니다. 이때 불만이 있는 사람은 직접 지적하지 않고 관리자에게만 말해야 합니다.
물론 성과를 지켜보는 시간 없이 관리자에게 이어폰 등의 문제로 협업하기 힘들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지만 말해봤자 나중에 성과가 괜찮은 사람으로 관리자가 인식하면 오히려 불편을 제기한 쪽이 '괜히 말했다' 와 같은 심정이 들기 때문에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차가 커도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해고되거나 계속 일하거나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럼에도 갈등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권리의 충돌 같은 겁니다.
LGTBQ(성소수자) 들 중 남들에게 he/him/she/her 등 자신이 원하는 인칭 대명사나 호칭으로 불러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인권" 이라 생각합니다.
헌데 "내가 말하는 내용은 내 자유의지"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상대에게 인칭 대명사나 호칭을 자기 마음대로 불러주길 강요하냐는 겁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생물학적 호칭을 보편적 기준에서 부를거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라는 것이죠. 최근 일론 머스도 이런 입장을 취했죠.
지금 몇몇 분들 포스팅을 보니 이어폰 문제를 "예의" (유교의 인의예지신 에서 예의 - 동양적 사상)으로 많이 해석을 하시죠. 예의란 뭔가요? 사회가 합의하는 보편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나요?
서양의 이런 문제는 "예의에 대한 분쟁" 이 아니라 "권리에 대한 분쟁" 입니다. 좀 더 법같고 논리적인 느낌이 많이 나죠. 그리고 개인의 신념에 의한 분쟁입니다. 사회가 합의하던 남이 뭐라고 하던 "내가 내 인권이 침해된다고 느끼면 싸운다" 입니다. 소수일지언정 말이죠. 보편성과 상관없습니다.
결국 서양은 "자유의 권리" 를 중요시해서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걸 기피하는데, 이게 인권과 같은 다른 "권리" 와 충돌할때 주로 싸우게 되는 겁니다. 동양과 좀 궤가 다른 면이 있죠.
이 외에는 애초에 개인주의라서 개인 취향에 대한 영역이 확고합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넓고 단단하죠. "음악 듣지 마세요, 이어폰 끼지 마세요" 와 같이 말하면 대개 사적 스타일에 대한 방화벽을 넘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음에 안들면 해고할지언정 이래라 저래라 사적인 스타일에 대해 선을 넘지 말아라" 가 기본 해석입니다.
예의 같은 것은 정말 95 % 이상이 동의하는 보편성을 띈 내용이 아니면 언급을 잘 안합니다. 속으로 불평하고 말 뿐... 특이한 사람이 많아서 내가 생각하는 "무릇 바람직한 관계/사회 는 이래야 한다" 라는 예의를 들이대면 결국 그 "특이한 사람" 들과 전부 싸울 수밖에 없게되고 본인이 피곤하고 살 수가 없는 노릇이거든요.
결론적으로 서양은 다양성이 커서(또 (주로 진보영역에서) 중시하기도 함) 세세한걸 이유로 따지면 갈등을 심하게 겪게 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도 어려워 이렇게 결과중심적으로 되었습니다. 서양 중에서도 유럽보다는 미국, 미국에서도 전통적 분야 보단 IT 분야가 더욱 이런 경향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동양적 모습에서 서양의 모습으로 이동하는 사이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도 스스로 젊꼰인가 생각든 게, 사무실에서 구루뿌(헤어롤) 앞머리에 말고 있는 건 보기 싫더라고요 ㅎㅎ; 지하철에서도 보기 싫고... 허용 가능한 범주가 각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 편을 드려는 게 아니고 거시적 관점입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은 궤가 다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본과 같은 삼단논법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A=B이고 C=A이면 C=B이다.
너무 쉽지만, 논리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엄밀하게' 쌓아가기 위해 절대 이를 무시하지 않고 중시한 겁니다.
피타고라스 역시 수학자로서 "증명"을 중시했고요. (반면 중국인들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우연히 발견하고도 증명하려는 노력없이 활용만 중시)
이들은 자연을 논리적 규칙으로 이해해 진리를 알고자 했습니다.
유럽은 중세의 암흑을 겪었으나 근대의 계몽주의 - 합리주의의 등장은 이를 더 부채질합니다.
동양철학은 제자백가의 중심인데 서양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백가는 정치적 견해를 띄었습니다.
고대 유럽이 '자연의 진리'를 원한 것과 배치되죠.
제자백가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고찰했습니다.
공포를 통한 욕구의 통제.. (법가)
인의예지신.. (유교)
서양철학에서는 심리는 논리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주제로 보고, 다양하게 이야기할지언정 특정 견해에 대한 확언을 자제했습니다. 증명/실증하기 어려운 점을 짚은것이죠.
'물처럼 살라' 는 노자 처럼 '도' 사상과 결합하기도 했는데요. 초월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반면 플라톤도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이데아를 추구하였으나 그는 '물처럼 살라' 와 같이 독자에 따라 해석하기 어려운 주장은 자제했습니다. 훨씬 명료한 논리를 추구했습니다.
예컨데 동굴의 우화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지하 동굴에 죄수가 갇혀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묶인 채로 벽만 보고 산다. 목도 결박당하여 머리를 움직일 수도 없다. 그의 등 뒤 위쪽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다. 죄수는 횃불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만을 보고 산다."
이렇게 우리가 보는 세상이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일 수도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이 허황되다 느낄지언정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뜻하는 바가 명확하거든요. 이는 데카르트의 주장과 매트릭스(시뮬레이션 이론) 과 같은 영화까지 이어집니다.
장자는 호접지몽으로 플라톤과 유사한 주장을 했으나, 그의 사장이 노자와 같이 굉장히 보편적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사람마다 해석이 다름), 엄밀한 논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MZ 세대는 역사상 가장 서구 철학에 많이 노출되었습니다.
합리성, 논리 위주의 교육/문화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증명", "입증", "합리", "이성" 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무교" 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이런 영향 아닌가 합니다.
남들이 어떻든 간에 내 개성과 독립적인 생각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선 교수가 수업서 배운 기존 이론을 지지해서 리포트 쓰지 말고, 반박하는 입장이 되어보라던지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비판(critical thinking) 이 중시되고, 다수가 주장해도 본인이 납득되지 않으면 이에 동조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반면 이보다 조금 더 전 세대는 전통적인 공동체 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예컨데 조금 납득되지 않아도 부드러운 해결을 위해 순응하는 것이죠.
이 순응의 기준에서 수직적 문화의 영향도 훨씬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구요.
그래서 인간관계적인 부분으로 문제 해결하려는 경향이 다소 있어 보입니다.
"꼭 이어폰을 사용해야 하나요?" 라는 물음은 "이유야 어떻던 우리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양보하며 잘 풀면 좋지 않을까?" 와 같은 취지가 담겨 있어 보입니다. 헌데 MZ 세대 입장에서는 "왜 이어폰 끼는게 좋지 않은지 이성적으로 납득" 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가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는데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꼰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중심 시각이 다른 것이죠.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중심이었습니다.
개인 사상이나 취향적인게 다양했죠. 해서 세세한 이유로 개인 자유를 제약하면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개인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도 어려운 일이죠.
해서 과정이야 어떻든 성과주의를 택했습니다.
일단은 터치하지 않고 지켜봅니다. 업무시간에 이어폰을 끼던 잠시 게임을 하던 인터넷 서핑을 하던 산책을 하던 뭘 하던지 말이죠. 그리고 나서 성과가 안좋다 싶으면 깔끔하게 해고합니다. 자유주의라서 노동법도 해고하기가 좋죠. 하루아침에 해고가 가능합니다. 물론 당일해고보다는 좀 더 세련되게 며칠 전이라도 이야기하는게 좋지 않겠냐는 의견은 있습니다. 하지만 의견이지 비난은 아닙니다. 최근 트위터 같은 경우는 1) 관리자나 동료에게 통지하지도 않고 갑자기, 2) 대규모의 인원을, 3) 잘못된 계산으로 (나중에 일부 돌아오라고 함), 4) 엉망인 프로세스로 해고하여 문제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당일 해고가 그렇게 비난받는 문화는 아닙니다. (물론 당사자 입장에서 화내는 사람은 있으나 정당성에 대한 항변보다는 "울분"으로 간단하게 해석됨)
이때 해고 기준은 대개 1) 관리자 마음 2) 평판 입니다.
이때 이 평판이라는 것은.. 우선 다른 직원에게 불편한 게 있으면 딱 한 두마디만 하고 꾹 참습니다.
예컨데 A라는 사람이 B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합시다.
이어폰 때문에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해 직접 쳐야 해서 불편하다는 등이죠.
그럼 A 는 "이러저러해서 불편한데, 수정 가능해요?" 물어봅니다.
B는 "전 이렇게 해야 일이 잘 되어서요. 너무 큰 문제라고 생각되면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할게요" 라 했다고 합시다.
그럼 A는 일단 알겠다고 하고 꾹 참습니다. 참는다기보다는 한동안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다시는 이어폰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상대 직원의 성과가 좋으면 능력은 순순히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이어폰에 대해서 앞으로도 쭉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과 좋은 사람을 상대로 행동거지를 선 넘어 지적하다가 지적한 쪽이 해고당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성과가 별로 같으면 관리자에게 성과도 낮은데 이런저런 (이어폰 등) 불편함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관리자는 이런 불만이 일정 이상 많이 나오면 해고합니다. 이때 불만이 있는 사람은 직접 지적하지 않고 관리자에게만 말해야 합니다.
물론 성과를 지켜보는 시간 없이 관리자에게 이어폰 등의 문제로 협업하기 힘들다고 말해도 됩니다. 하지만 말해봤자 나중에 성과가 괜찮은 사람으로 관리자가 인식하면 오히려 불편을 제기한 쪽이 '괜히 말했다' 와 같은 심정이 들기 때문에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차가 커도 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해고되거나 계속 일하거나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럼에도 갈등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권리의 충돌 같은 겁니다.
LGTBQ(성소수자) 들 중 남들에게 he/him/she/her 등 자신이 원하는 인칭 대명사나 호칭으로 불러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인권" 이라 생각합니다.
헌데 "내가 말하는 내용은 내 자유의지" 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상대에게 인칭 대명사나 호칭을 자기 마음대로 불러주길 강요하냐는 겁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생물학적 호칭을 보편적 기준에서 부를거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라는 것이죠. 최근 일론 머스도 이런 입장을 취했죠.
지금 몇몇 분들 포스팅을 보니 이어폰 문제를 "예의" (유교의 인의예지신 에서 예의 - 동양적 사상)으로 많이 해석을 하시죠. 예의란 뭔가요? 사회가 합의하는 보편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나요?
서양의 이런 문제는 "예의에 대한 분쟁" 이 아니라 "권리에 대한 분쟁" 입니다. 좀 더 법같고 논리적인 느낌이 많이 나죠. 그리고 개인의 신념에 의한 분쟁입니다. 사회가 합의하던 남이 뭐라고 하던 "내가 내 인권이 침해된다고 느끼면 싸운다" 입니다. 소수일지언정 말이죠. 보편성과 상관없습니다.
결국 서양은 "자유의 권리" 를 중요시해서 남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걸 기피하는데, 이게 인권과 같은 다른 "권리" 와 충돌할때 주로 싸우게 되는 겁니다. 동양과 좀 궤가 다른 면이 있죠.
이 외에는 애초에 개인주의라서 개인 취향에 대한 영역이 확고합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넓고 단단하죠. "음악 듣지 마세요, 이어폰 끼지 마세요" 와 같이 말하면 대개 사적 스타일에 대한 방화벽을 넘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마음에 안들면 해고할지언정 이래라 저래라 사적인 스타일에 대해 선을 넘지 말아라" 가 기본 해석입니다.
예의 같은 것은 정말 95 % 이상이 동의하는 보편성을 띈 내용이 아니면 언급을 잘 안합니다. 속으로 불평하고 말 뿐... 특이한 사람이 많아서 내가 생각하는 "무릇 바람직한 관계/사회 는 이래야 한다" 라는 예의를 들이대면 결국 그 "특이한 사람" 들과 전부 싸울 수밖에 없게되고 본인이 피곤하고 살 수가 없는 노릇이거든요.
결론적으로 서양은 다양성이 커서(또 (주로 진보영역에서) 중시하기도 함) 세세한걸 이유로 따지면 갈등을 심하게 겪게 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도 어려워 이렇게 결과중심적으로 되었습니다. 서양 중에서도 유럽보다는 미국, 미국에서도 전통적 분야 보단 IT 분야가 더욱 이런 경향입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동양적 모습에서 서양의 모습으로 이동하는 사이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관점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도 스스로 젊꼰인가 생각든 게, 사무실에서 구루뿌(헤어롤) 앞머리에 말고 있는 건 보기 싫더라고요 ㅎㅎ; 지하철에서도 보기 싫고... 허용 가능한 범주가 각자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