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레이크 장날

ACCI
ACCI · 글과 글씨를 씁니다.
2023/06/14
온 동네 사람들이 토요일 오전에만 내뿜는 집단적 여유로움이 있다.

오전 7시에서 10시 정도까지만 유효한 이 공기를 놓치지 않으려 조용히 나선다. 자고로 이런 순간은 홀로 즐겨야 제 맛! 남편이 혹시나 따라나설까 옷도 살살 주워 입고 현관문을 살모시 닫는다. 뒷마당에 놀던 벌새들은 살모시에도 소스라치며 호다닥 전선줄 위로 줄행랑.

노곤하면서 생기 있는 이 공기는 종종 엄마 손 잡고 수수부꾸미 사 먹던 서문시장으로 나를 끌고 가기도 한다. 오랜만에 불러보는 수수부꾸미. 참 예쁜 이름. 토요일 오전에는 동네 장이 열려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생일날 주신 백 불을 손에 쥐고 산책 나온 김에 장날 구경을 간다. 현금을 잘 쓸 일이 없지만 이럴 때 요긴하다.

남편 말로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생일이면 손에 백 불을 쥐어주셨다고 한다. 서른아홉이 된 아들에게도 한결같이 백 불을 주시는데 그 사람과 결혼한 나도 10년째 그 집안 전통에 참여 중이다.

백 불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아본다. 어릴 적 천 원을 쥐고 문구점에 들어섰을 때의 설렘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내 마음. 왜 안 달라졌지? 이게 뭐라고 들뜨지?

한참을 어슬렁하다 보니 사고 싶은 물건은 없고 그저 시장의 분위기에 돈을 지불하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애지중지 키워낸 버섯, 보라색 컬리플라워, 유정란, 튤립 등이 한쪽에 자리 잡았고 손수 만든 목걸이, 반지, 그림도 출동했다. 다들 어른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들의 얼굴에선 ‘사람들이 좋아해 줄까’ 하는 어린이 표정이 관찰된다. 저런 표정들...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여행, 음악, 인문, 산책에 심취하며 캘리그래피와 통/번역을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삽니다.
58
팔로워 46
팔로잉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