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348편 - 우크라이나의 조상 코사크인들, 과거 우크라이나인들이 우리 역사와의 인연이 있을까?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26
정답은 Yes 이다. 그럼 어떤 인연이었을까? 오늘은 서울에서의 약속이 있어 저녁에 늦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현 상황의 논평, 그리고 관계성, 역사에 관해서 등등을 포스팅하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분들을 위해 하나 장만했다.
사진 : 나선정벌 조선군 진격로,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때는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개척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베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은 1581년에 코사크의 수장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코사크라는 어원도 원래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거운 세금과 노역을 피해 변경 지방으로 도주한 농노들 또는 그들의 자손들이 품팔이와 수렵 또는 약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예르마크는 이러한 코사크들의 수장으로 볼가 강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정부의 단속을 받아 수감되었지만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구제 요청으로 인해 석방되었고 그는 러시아 황실에 약간의 지원을 받고 시베리아 개척에 나선다. 그리고 오늘날 노보시비르스크에 자리잡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고 세묜 볼호프스키(Семен Волховский)의 지원을 받아 쿠춤 칸국도 정복하면서 바이칼에 이르렀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로 바이칼에 다다른 인물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이르쿠츠크에 가면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러나 예르마크와 볼호프스키는 승리 속에 방심하고 있다가 타타르의 복수 부대에 역습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예르마크의 원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우랄산맥을 건너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본국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만치 않은 강적인 타타르족을 만난 셈이라, 신중하게 움직였다. 1643년, 모스크비친(Moskvicin)이 거느리는 시베리아 탐험대가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 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조사하게 되면서 중국 청나라의 영토까지 불법으로 넘나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이자성에 의해 붕괴된 북경을 청나라가 다시 차지하여 제3대 순치제가 청나라 황제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이에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탐험대를 파견했다. 파견된 포야르코프 탐험대는 아무르 강이 오호츠크 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답사한 다음, 그 곳 부족들의 동향에 대해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오호츠크 일대의 부족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지 않고 있고 이들을 잘 공략하면 러시아에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민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듬해 파견된 하바로프 탐험대는 포야르코프의 보고를 재확인했고, 오호츠크 연해는 매우 비옥하여 농산물 소출이 좋다는 점, 이를 배경으로 오호츠크 연해와 사할린 섬까지 점령하면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어 보고하게 된다. 

1651년 하바로프는 본국에서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아무르 강 유역의 다구르 족을 공격했다. 이 때 증원된 병력이 바로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 부대다. 이들의 용맹성은 폴란드의 후사르 윙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 최강의 군대로 알려져 있다. 이에 소수의 청나라 군사가 지원했으나 다구르 족과 소수의 청나라 지원군으로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결국 패배한 청나라는 물러났고 하바로프는 한 동안 러시아 군의 제1 전진 기지가 될 알바진(Albazin) 요새를 건설했다. 1652년에는 네르친스크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시베리아 중부에서 새 영토들을 개척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죄수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이들 또한 우크라이나 땅인 드네프르 강 일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자포로제 코사크 족이었다. 결국 이들이 연해주와 극동 지역의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최초의 정착민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청나라도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진입에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0여 명의 병력으로 알바진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에 맞선 코사크 군은 20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우수한 무기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잘 방어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투는 서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러시아-코사크 기병대를 축출하지 못한 청나라의 패배에 가까웠다. 러시아가 만만하지 않은데다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들의 활약에 그 위험성 깨달은 청나라는 무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조선에 조총수들을 파병해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조선의 조총수 파병 요구의 배경은 당시 청나라가 남쪽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으로 인해 주력군들이 죄다 남쪽으로 파병되어 있었고 북방을 지키거나 러시아-코사크군을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 1649~1659)이 즉위하던 때였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효종실록>12권, 5년 (1654 갑오 / 청 순치(順治) 11년) 2월 2일(계해) 1번째 기사에 의하면 청나라에 다녀온 차사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돌아와 “조창(鳥槍)을 잘 쓰는 사람 1백여 명을 뽑아 보내라”는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하자 효종이 ‘나선’이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거원은 “영고탑 근처에 사는 별종들”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침내 영의정 정태화가 북우후(北虞候) 변급을 군사 인솔자로 추천하였고 변급은 회령에서 8일만에 영고탑에 도착했다. 이어 영고탑에서 다시 14일 가서 왈합에 도착하여 코사크 소총수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때 러시아-코사크 군은 큰 배가 13척, 작은 배가 26척이었다.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 하자 변급은 “이 작은 자피선으로 어떻게 큰 서양 배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부하자 이를 타당하게 여긴 청나라 군은 왈합 원주민 300여 명과 청군 300여 명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조선군에게는 포병으로 지원사격을 맡겼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한편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그 유명한 코사크 인들은 장교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군의 뛰어난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과 코사크 군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군함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 군함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 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그 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기습공격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쟁이 바로 나선정벌로 이어서 1655년의 코마르(Komar) 공방전, 1657년의 사르호디(Sarhodi) 전투, 1658년의 제2차 나선정벌 등에서 양측은 다시 공방전을 벌였으나 1660년 이후로는 청나라 측이 명나라의 잔적들을 섬멸함에 따라 러시아의 남진에 집중할 수 있어 우세를 잡게 되었다. 이에 더 이상 조선의 조총수들을 요청하지 않게 됨에 따라 결국은 우크라이나의 조상인 코사크인들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당시 나선정벌 때 러시아군의 주력은 코사크인들이었기 때문에 현재 우크라이나와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우크라이나의 조상들과 우리 한국사는 굵고 짧은 전쟁으로 인해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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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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