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성미급한 미국인에 대하여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2/12/24
어느 성미 급한 미국인에 대하여 
.
6.25를 겪은 세대가 미국을 바라보는 태도는 임진왜란 후 조선 사람들이 두고두고 섬겼던 ‘재조지은’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기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6.25는 북한의 일방적인 ‘국토 완정’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북한은 스탈리의 승인 하에 치밀한 전쟁 준비를 해 온데다 소련의 기갑 전력과 완전무장한 조선족 사단까지 받아들인 상황이었고, 남한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낙동강 원진을 구성했더라도 한국군으로서는 인민군의 파상공세를 막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이름을 잇게 만들어준 것은 역시 미군의 지원이었다. 흔히 우리는 그 최대 공로자로 맥아더 원수를 꼽지만 더하여 한 명의 이름을 빼놓기 어렵다. 월턴 해리스 워커 중장 (1889~1950) 
.
 
윈턴 해리스 워커 (나무위키)
 
따로이 관상에 식견이 없더라도, 인상만 보고도 파악되는 사람이 있다. 워커 중장은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그의 생전 사진을 보면 딱 불독상이다. (실제 별명이 그랬다.) 물면 안놔줄 것 같은 투쟁심 그득한 무골의 인상이라는 뜻이다. 그 분위기에 걸맞게 그는 저 유명한 ‘패튼대전차 군단’의 주요 지휘관이었다. 기갑부대를 이끌고 독일 깊숙이 들어가 나치 만행의 중요한 증거가 된 부헨발트 수용소를 해방시키고 히틀러의 고향 오스트리아 린츠까지 손에 넣었던 것이 그였다. 
.
유럽 전선이 끝난 후 그는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돼 일본 주둔 미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하는데 쇼맨쉽 하나는 끝내주고 사진 촬영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재연도 서슴지 않았던 더글라스 맥아더와는 당연히 서먹서먹했다. 반면 태평양에서 죽어라고 덤비는 일본군에게 무진 고생을 겪었던 맥아더는 유럽 전선에서 온 워커를 무시했다. 같은 유럽 전선 출신이라도 맥아더의 입안의 혀같이 굴 줄 알았던 알몬드 소장 (인천 상륙작전 중 기함에서 파이프 물고 앉은 맥아더 앞에서 비서처럼 허리 숙이고 전황 설명하는 이가...
김형민
김형민 님이 만드는
차별화된 콘텐츠,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273
팔로워 3.5K
팔로잉 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