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혼과 예술을 지켜냈다 - 간송 전형필
2024/05/23
종로 배오개 출신 문화재수집가 전형필
수년간 문을 닫아 걸고 있던 간송미술관이 최근 새단장을 하고 <보화각 1938 - 간송미술관 재개관전>을 열었습니다. 이에 맞춰 간송 전형필과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에 대해 써봤는데요. 혜원, 단원, 오원, 겸재, 추사는 물론 여러 서화 및 골동 등 볼만한게 많지만, 짧게만 열기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에 긴 줄을 불사하고 대기했다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간송 전형필에 대해 한 번 읽어보시죠.
‘간송미술관’의 간송(澗松)은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유실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샅샅이 수집한 인물이다. 그는 경성 대부호 전명기(全命基)의 아들로 태어나 10만석 자산을 물려받은 상속권자였다. 그의 증조부 전계훈(全啓勳)은 정3품 무관직인 중군(中軍)을 지낸 관료였으나, 한양 배오개(현 종로4가 인의동)에 터를 잡은 뒤 조선 최고의 거리인 운종가, 즉 종로의 상권을 장악해 부를 일궜다. 현재 종로의 광장시장이 바로 전씨 집안이 활약했던 배오개시장의 역사를 이은 곳이다.
전형필은 물려받은 전 재산을 일평생 문화재를 사 모으고 보호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이름난 골동과 질 높은 서화를 수집한 행적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난 뒤에도 그다지 대단한 일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문화재 수집과 보존 활동을 대부호의 호사 취미 정도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형필은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가문의 재산을 상속했다. 후사가 없던 작은아...
@강부원 어유. 아닙니다. 전문가라뇨. 어쩌다보니 학예사 자격증 관련 책을 읽다가 말아버린 터라 부끄럽네요. 근데 반대로 전문가 또는 관련 종사가들로부터 인정 받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저는 더 놀랍습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사실 관계를 실증하는 작품 또는 유물이면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러한 것을 아카이빙하는 활동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강부원 작가님 글을 읽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징저 재개관전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모양입니다. 볼만 합니다.
@에스더 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박희인 정신이 없어 답이 늦었습니다. 관련 조사자나 전문가들께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데, 간송을 그리 평가하시다니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인가봅니다. 감사합니다.
간송 정형필님에 관해 잘 읽고 갑니다.
귀한 정보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저녁 되셔요 ~♡
박물학에 대해 짧게나마 알고 있는 바를 바탕으로 간송 전형필의 행적을 보면, 그가 이룬 업적은 정말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네요.
재개관전을 하는군요. 간송미술관 10년전에 가봤는데, 이 글 보니 또 가고 싶네요.
@강부원 어유. 아닙니다. 전문가라뇨. 어쩌다보니 학예사 자격증 관련 책을 읽다가 말아버린 터라 부끄럽네요. 근데 반대로 전문가 또는 관련 종사가들로부터 인정 받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 저는 더 놀랍습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사실 관계를 실증하는 작품 또는 유물이면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그러한 것을 아카이빙하는 활동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강부원 작가님 글을 읽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입니다. 아무튼 답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물학에 대해 짧게나마 알고 있는 바를 바탕으로 간송 전형필의 행적을 보면, 그가 이룬 업적은 정말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네요.
재개관전을 하는군요. 간송미술관 10년전에 가봤는데, 이 글 보니 또 가고 싶네요.
@칭징저 재개관전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모양입니다. 볼만 합니다.
@박희인 정신이 없어 답이 늦었습니다. 관련 조사자나 전문가들께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데, 간송을 그리 평가하시다니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인가봅니다. 감사합니다.
간송 정형필님에 관해 잘 읽고 갑니다.
귀한 정보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저녁 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