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암투사] 수양대군, 김종서부터 치다
[계유정난 ①]
우리는 앞에서 조선 시대 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단종을 만났었다. 그는 아버지 문종이 세자 시절에 태어나 ‘적손’과, 맏아들이라는 ‘장자’의 지위까지 갖춘 왕 아니던가.
우리는 앞에서 조선 시대 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단종을 만났었다. 그는 아버지 문종이 세자 시절에 태어나 ‘적손’과, 맏아들이라는 ‘장자’의 지위까지 갖춘 왕 아니던가.
태어나자마자 엄마 현덕왕후 권씨의 사망으로 자칫 세자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었지만, 아버지 문종의 흔들림 없는 후원으로 ‘단종’이 될 수 있었다.
열두 살에 보위에 올랐다. 이럴 때 무슨 제도를 시행하는가. 그렇다. 수렴청정. 왕비나 왕대비가 발을 내리고 정치를 돌보던 제도. 그런데 단종에게는 이런 수렴청정할 왕실 어른이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죽었다. 양모가 있었더라도 세종의 후궁인데다 시동생 수양대군에게서 견제받고 있었던 터여서 불가능했다. 어찌 보면 거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형국이었다.
더욱이 단종은 세자 시절 세자빈(부인)이 없었다. 만약 힘깨나 쓰는 처가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리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은 자신의 병세가 악화했을 때 아들인 세자의 세자빈을 들이려고 간택령까지 내렸었다. 하지만 문종의 사망으로 간택령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그렇게 세자빈 없이 세자는 왕이 되었다.
단종이 가례를 올린 건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1454년이었다. 쿠데타로 이미 권력을 잡은 삼촌 수양대군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부인은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단종의 가례는 조선시대 역사를 통틀어 세자가 아닌 왕의 첫 가례로는 최초였다. 대부분이 세자 시절이 이미 가례를 올리기 때문에 왕이 되어서 가례를 올리는 건 왕비의 사망이나 폐위됐을 경우이다. 아무튼 단종과 가례를 올린 정순왕후의 운명은 남편 단종과 함께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삶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아버지 문종은 마음이 놓이질 않았고, 그래서 고명대신들에게 특별히 보필하라고 부탁하면서 제도를 만들었다. 이른바 ‘황표정사(黃標政事)’. 고명대신들이 올리는 인사안에서 적합한 인물의 이름에 누런 쪽지(황표) 붙이면 단종은 붓으로 그 이름 위에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단종실록》(1452년 7월 2일 치) 기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