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그리고 타당한 실체로서의 트루먼(true-man), 트루먼 쇼를 보고.

2022/05/09
이 영화를 보고 한 번쯤은 벽을 두드려 본 경험이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내심 exit 버튼을 찾아 헤매진 않았는지. 
적어도 어려서의 나는 그랬다. 뭐야, 나도 쇼에 갇혀있는 거 아니야? 저기요? 들리세요? 허공에 혼잣말도 했는데 상대방은 내내 묵묵부답. 일관된 냉담함에 더는 말을 붙이기 지쳐버리긴 했지만. 트루먼 쇼처럼 버젓이 눈에 보이는 탈출구가 달리 있지는 않은데, 과연 정말 없는 걸까?
그런 물음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트루먼쇼는 말하자면 ‘트루먼, 몰래 카메라 대작전!’ 같은 문구로 간단명료하게 요약이 된다. 그렇다. 전 세계 인구가 짜고 치는 고스톱을, 무려 한 사람을 두고 치는 거다.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느낄 여지조차 없으니 당사자는 뭐가 문제인지 자각할 수 있을리 없다. 일상이 주는 적당한 수축과 이완에 그럭저럭 젖어들었으면 트루먼쇼가 종영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어느 날, 별의 추락을 시작으로 그의 세상도 조금씩 추락하기 시작한다. 
트루먼은 — 실험실의 생쥐처럼 인위적으로 소프트웨어에 세팅 된 — 트라우마가 있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이어지지 못하는 등의 좌절을 맛보긴 하지만 대체로는 이른바 ‘정답’과도 같은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해 간다. 겉보기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는 그런 생활이 줄곧 펼쳐지는 셈이다. 모든 극이 그렇듯 내내 즐거워서도 안 되고, 내내 슬퍼서도 안 되므로 사건과 에피소드라는 조미료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트루먼의 일생은 평이하고 안온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소리는 조금 다른 이야길 한다. 아마 모든 균열은 그가 그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현존하는 그 순간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트루먼의 이상한 행동을 — 당연히 — 알게 된 부인(역할) 메릴 — 과 제작진 — 은 트루먼에게 이제 아이를 낳고, 모기지 대출을 갚으며, 꼬박꼬박 저축도 하며 살 것을 은근히 종용한다. 그게 행복하고 올바른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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