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344편 - 군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해 문치라는 허울로 변질시킨 송나라의 유학, 성리학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6/26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후주를 전성기로 이끌었던 세종의 유언과 부탁을 받고 후주의 어린 황제 말제를 보호하기로 했지만 끝내 세종과의 약속을 버리고 어린 황제 말제의 제위를 찬탈한다. 후주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킨 조광윤은 정권 전복으로 인한 대표적인 현상으로 이것은 유교 국가로써 성공한 역성혁명의 첫 사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같은 역성혁명으로 고려 유학자들이 중심으로 나라를 뒤엎어 이성계를 세우고 조선을 열었다.
사진 :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어진,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D%83%9C%EC%A1%B0%28%EC%86%A1%29

조광윤은 5대 10국의 혼란기를 직접 겪었고 역대 중원의 역사로 볼 때 수많은 쿠데타로 국가가 전복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사례가 나올것을 우려하여 황제에 대한 절대 권력을 강조하고 유학을 장려하여 무(武)보다 문치(文治)을 내세웠으며 후주 말제의 제위를 찬탈한 컴플렉스로 인해 황권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는 군권을 가지고 있는 절도사들의 군권을 해임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문(文)과 덕(德), 지(智)로 통치하겠다는 뜻을 관철시켰다.

그로 인해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들 중 가장 문화가 발달했지만 역으로 가장 군대가 허약한 나라가 되었다. 국경을 지키는 군사도 얼마 되지 않은데다 지속적으로 거란의 요(遼)나라와 탕구트족의 서하(西夏)의 침공을 받았고 이들을 달래는 외교로 일관하여 경제적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연합하여 요(遼)나라를 타도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중개하는 외교력도 한계를 보였으며 결국 금나라의 침입에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겪었다.

송 태조 조광윤의 군에 대한 두려움과 컴플렉스, 본인이 했던 부도덕한 찬탈 행위 등이 문무를 고루 발달시켜야 하는 국가를 군사력이 최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문치적인 국가로만 득세시키며 이에 대한 정치적 긴장감이 없어지니까 관료 부패를 오히려 더 촉진시키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당시 송나라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강조되던 단어는 의(義)였다. 

부도덕한 불의로 전 정권의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오히려 사회 정의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우고 수호지 같은 소설이나 판관 포청천 같은 극화의 배경을 만들며 의(義)를 전면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또한 이런 정책적 부작용으로 나타난 관료 부패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두 작품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송나라는 중원 역대 통일 국가 중 가장 의(義)롭지 못한 국가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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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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