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씨
복사씨 · 비난의 고통을 공론화의 에너지로!
2021/10/29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의 시 구절이 저는 제일 먼저 기억납니다. 이 시구절로 두루 인용되어온 <그날>이란 작품은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라는 시집에 실려있어요. 매체들이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못할 때, 문학이 5.18을 어떻게든 기록해 두려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임철우의 <봄날>이란 소설과 함께 5.18하면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날
                                                - 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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