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체 비만자에게 허락된 바지는 없다

이건해
이건해 · 작가, 일본어번역가. 돈과 일을 구함
2023/06/14

바지 얘기를 하자니 ‘바지를 좋아하시는지?’처럼 상투적인 질문부터 떠올랐는데, 좋아하고 말고 이전에 최소한 한국에선 아직 남성이 하반신에 입을 옷으로 바지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 같다. 위생적인 목적으로 앞치마를 두르는 경우도 있긴 하나 이것도 바지 위에 입는 것이지, 바지를 입지 않고 앞치마만 입을 수는 없다. 그러고 돌아다니다간 잡혀간다.

그런고로 근래에는 새 바지를 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일단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술을 퍼마셨더니 살이 쪄서 바지가 한 치수 늘어났다. 그 상태에서 대충 편한 면바지를 입고 여행에 갔더니, 찍힌 사진마다 꼬락서니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은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아저씨가 아닐 수는 없을지라도 추하게 남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잡지사 1.5도씨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하루빨리 적당하고 말끔한 바지를 찾아야만 했다. 매체에 소개되는 게 처음인데 최소한 평균으로 남고 싶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처음 생각한 것은 단정하고 시원한 여름용 슬랙스였다. 경우에 따라선 슬랙스를 입으면 한층 더 회사 다니는 아저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냥 헐겁고 큰 면바지나 대충 주워 입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되느니 회사 다니는 말끔한 아저씨로 보이는 게 나을 것이었다. 게다가 청바지는 사이즈만 맞춘다면 십 년쯤 입을 수 있을 만큼 많으니까 슬랙스를 좀 더 사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예전에 살펴보고 꽤 괜찮다 싶었던 쇼핑몰 앱을 깔아서 한참 뒤적이다가 할인중인 슬랙스 하나를 골랐다. 기장도 선택지가 둘이나 되고 허리도 편하며 색깔도 다양한 것으로. 바지를 안 입어보고 사는 것은 오랜만이라 대단히 신중하게 사이즈를 비교해서 주문했다. 암살 계획에 따라 총기를 선택하는 존 윅이나 고르고 13만큼 신중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바지를 받아서 입어보니 그토록 신중하게 고른 바지는 약간 작았다. 길이도 생각보다 길었고, 고간도 다소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며, 주머니의 형상도 훤히 드러났다. 여자 옷에 왜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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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스터리를 주로 쓰고 IT기기와 취미에 대한 수필을 정기적으로 올립니다.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소설 “심야마장-레드 다이아몬드 살인사건”으로 데뷔. SF호러 단편소설 ‘자애의 빛’으로 제2회 신체강탈자문학 공모전 우수상. 제10회 브런치북 출판공모전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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