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판 오 분 전 : 어휘력의 하향평준화 시대
2023/01/12
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진 김영하 교수가 나오는 영상을 보았다. 꽤 오래 전에 녹화된 방송인 것 같았다. 영상에서 교수는 ‘짜증나’라는 단어를 학생들에게 금지시켰다는데 그 이유는 수많은 감정 표현이 ‘짜증나’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더없이 공감되는 영상을 돌려보고 다시 돌려보았다. 짜증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라 내 속에도 켜켜이 쌓였다. 언젠가의 짜증남은 정확히 말하면 서운함, 답답함, 섭섭함, 속상함 등 수없이 적합한 마음가짐의 표현을 제치고 쉬이 뭉개졌던 거다.
빡친다는 말이 쉽게 들렸다. 길을 걷다가도 몇 번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주 들었는데, 그 강한 된소리가 처음엔 거슬렸으나 이젠 자극에 둔감해져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앞서 작가가 말했듯, ‘빡친다’는 ‘짜증나’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빡친다는 결괏값에 대해 정말 그 이유를 톺아보면 화가 났는지, 언짢은지, 불쾌한지. 화가 나다의 속된 말인 빡친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상 ‘어찌나 화가 났으면’이라는 생각보다 앞서, 감정의 생략으로 이젠 너무 쉽고 빠르게 깊은 분노에 도달하고 말게 된 것이다.
언어의 생물성
아는 형의 집에 머무르며 언어의 하위호환을 잉태하는 사태들에 대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굳이 언어는 어려운 용어를 이용해야만 하는가? 그럼 쉬운 용어의 호환이 더 나은가? 사람들의 이해를 기준으로 한다면 쉬운 언어가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운 용어가 어려운 용어보다 고급 어휘라고 일컬어지지는 않는다. 다양하고 어려운 용어는 어떤 존재이유가 있을까. 과거의 글에서 굳이 나는 조금 더 낯선 용어의 사용을 즐겨했다. 정확한 단어, 적확한 단어를 언어에서도 찾으려 노력했고 중의적 의미로 유희를 던지는 것이 삶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형은 내게 왜 굳이 고어라던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어나 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