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도 조장하지도 않는 삶

ACCI
ACCI · 글과 글씨를 씁니다.
2023/08/05
거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고 창가에 앉아
새벽이 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착한 남자친구처럼 매일 창 밖에 먼저 와서 기다리는 새벽을 가만히 보노라면 이내 나도 그것이 되어버려 감상이 불가능해진다. 나는 감상하는 게 재밌으니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몰입을 흩트리려 창문을 살짝 들어 올린다. 새파란 물결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들이닥치고 노트북 위에 가지런한 두 팔의 잔털들은 일제히 기립한다.

너무 좋단다.
사람이 폐로만 호흡하는 게 아니라며. 자기들도 바람을 좀 쐬어야 살 맛이 난단다. 그래? 알았어. 말 나온 김에 바람 제대로 맞혀주마.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 침대 위에 자고 있는 남편을 콕콕 찌른다. 찔림 당하면서도 비몽사몽 나를 보고 웃어주는 그는 내 인생에서 착한 남자친구역이다(그의 인생에선 내가 무슨 역할인지 물어본 적은 없다. 뭐가 됐든 기꺼이 해 줄 참).

"지금 일어날 필요는 없는데... 우리 오늘 바닷가 가야 되거든? 일단 실컷 자!"

남편은 메시지보다 표정과 말투에 주목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주요 메시지는 본문에 숨긴 채 서론과 결론이 최대한 가볍고 상냥하게 들리도록 연기한다. 부부의 삶은 이리도 고단하다. 내 법계의 상식은 그의 세계에서 생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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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음악, 인문, 산책에 심취하며 캘리그래피와 통/번역을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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