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14일 열혈한 이준의 최후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7/14
1907년 7월 14일 열혈한 이준의 최후

1859년 1월 함경도 북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초명은 이성재(선재라고도 한다), 후일 이름을 ‘준’(儁)으로 바꿔 ‘이준’이라 불리게 되는 이 아이는 열 두 살 되던 해 북청 향시에 응시했는데 좋은 성적을 얻고도 급제하지 못하자 이에 분노해서는 답안지를 들고 북청성 남문 문루에 올라 소리를 지르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기본적으로 성정이 곧고도 드센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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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의 삶은 그 나라의 운명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함흥 순릉 참봉에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다시 상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 양성소에 들어갔고 1896년 검사시보에 임명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면서 그 역시 일본에 망명해야 했던 것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던 그는 독립협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만민공동회를 주도했고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무산시킨 보안회 활동에도 열심이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의 한 가운데에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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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개화파로서 시세를 거스르는 수구적인 대신들을 서슬 푸르게 공박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섬에 유배되기도 했던 이준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에 대한 배신감에 몸을 떨며 을사늑약 반대 운동과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했는데 1906년 그에게 가장 걸맞았다고 여겨지는 역할을 맡게 된다. 평리원 검사, 요즘의 검사와도 이름도 직분도 같은 관직에 임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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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사위의 기록에 따르면 간악한 소인배들, 즉 매국노 대신들이 이준을 회유․견제하는 방법으로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주되 지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자리를 주고자 했고 이 말을 들은 이준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결심으로 ‘평리원 검사라면 해 보겠다’고 한 바, 법부대신 이하영이 나서 평리원 검사로 임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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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평리원에 의해 기소돼 매질을 당하기도 했던 ‘전과자’였던 이준 검사는 짧은 검사 생활 동안 검사가 지녀야 할 덕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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