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의 고고인류학 187편 - 해상 교통의 요지, 인도네시아와 말레카 해협, 그리고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중세 역사

알렉세이 정
알렉세이 정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연구교수
2024/05/24
인도네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7세기에는 수마트라에서 스리위자야 왕국이 크게 흥성했다. 8세기에 들어서는 자바에서 산자야 왕을 시조로 하는 마타람 왕국이 건국되었다. 마타람은 이어 샤일렌드라라고 칭하는 일련의 왕들이 지배하는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대를 따로 분류하여 샤일렌드라 왕조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샤일렌드라 왕조의 번영은 1세기로 끝나고 9세기에는 산자야 가문의 인물에 의해 마타람 왕국이 다시 부활했다. 샤일렌드라의 마지막 왕자는 스리위자야 왕국으로 피신해 거기서 왕위에 오르니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타람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일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사진 : 1세기 인도네시아 선박은 아프리카까지 무역 항해를 했다. 보로부두르 불탑에 새겨진 배 사진출처 : Borobudur Temple Compounds - UNESCO World Heritage

하지만 이러한 적대적인 부분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샤일렌드라와 스리위자야 왕국은 공히 불교 국가였던 데에 반하여 마타람 왕국은 힌두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다. 마타람은 1222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였지만 서로 간의 경쟁의식이 뚜렷했던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스리위자야 왕국이 1290년에 멸망했다. 수 세기 동안 두 왕국은 경쟁 관계를 이어 오다가 마타람과 스리위자야 왕국은 같은 세기에 사라졌던 것이다. 9세기 중부 자바를 장악하고 이 지역에 다시 힌두교의 영향을 확대해 가던 마타람은 스리위자야 왕국의 위협에 밀려 10세기에 동부 자바로 이주한 바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마타람 왕국은 힌두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이 결합되는 독특한 자바 문화를 창달했고, 11세기 아이르랑가(Airanga) 시대를 들어서면서 불교와 공존하는 모습으로 크게 발전했다.

동부 자바의 적극적 개간으로 가경지가 확대되면서 스리위자야 왕국이 쇠퇴하였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도 자바 동부 지역으로 옮겨 왔다.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스리위자야 왕국과의 극적인 화해도 이 때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12세기 자바 전역은 하나의 권력 내로 통합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1222년 마타람이 멸망하고 싱가사리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한 번 인도네시아 역사에서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종교적 성향은 12세기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지배 권력의 범위가 자바를 초월해 수마트라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부터 진정한 민족주의적 인도네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라덴 위자야가 몽골 원정군을 격퇴하면서 수립된 마자파히트 왕조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특히 13세기는 점진적인 변화가 발견되고 있다. 각국에서 중앙 권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외적인 팽창이 보이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지배지가 확대되고, 유교, 불교, 힌두-자바의 중앙 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13세기 종실 지배 체제하에서 중앙 권력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고 국가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며 쯔놈 문학이 발전했다. 캄보디아에서는 관료 제도가 정교해지고 여행자 휴식소를 설치한 것에서 파악되듯이 중앙과 지방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13세기에 자바의 통합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이는 자바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세계의 확대가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보이는 통합 노력의 원인이자 결과는 이 시대에 발현된 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쿠빌라이의 원나라 원정군들이 참파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각지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으며 몽골 또는 중국의 북방, 남방 간에 벌어진 대결에서 북방의 도전에 대응하는 남방의 자신감과 승리는 13세기 문화 발전의 힘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샤일렌드라는 약 1세기 동안 동남아시아 해안 지대를 장악했던 해상 강국이었다. 사실 이러한 해상 강국은 보통 그 상업적인 번영 등을 놓고 고려해 볼 때 가장 짧고 굵게 그 역사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국가였다. 단지 이들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을 장악하여 중개 교통지를 장악했다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이지 샤일렌드라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본 연구자가 처음 샤일렌드라를 접했을 때는 자바 섬과 수마트라에 고립된 국가나 다름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바 섬 각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석들을 연구하고 금석학적인 부분, 그리고 이곳을 장기간 식민지로 삼았던 근현대 시기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자료들을 최대한 검토했다.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비문과 기록, 인도 촐라 왕조가 자바 섬을 정복하고 스리위지야 왕국을 무력화시킨 이후의 촐라 왕국 측이 서술한 기록들도 확인했다.

특히 샤일렌드라에 대한 고고학적인 유적은 단연 보로부두르이다. 이 불교 유적은 당시 힌두교와 상좌부 불교로 통용되던 동남아시아의 특성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승불교의 흔적이라는 것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었다. 그 정도 건축물을 건설했다는 것은 당시 샤일렌드라 왕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강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샤일렌드라는 상업과 농업을 병행했고 익히 알려진 것은 대단한 해양 상술로 인도네시아 일대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파악한 것은 해적들을 소탕하여 그들의 항해술과 선박 건조 기술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과 상륙군을 건설했고 동남아시아에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안가와 함선이 들어갈 수 있는 강을 따라 육지를 정복했다. 결국 이들은 말레이 반도와 태국 남부 해안, 현 캄보디아 해안가와 톤레삽, 바탐방 일대를 장악했으며 메콩 델타까지 점령해 참파를 베트남 중부 지방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멀게는 북베트남까지 진출해 당시 당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안남도호부 소속의 교주군을 정복했고 비록 장악 기간이 2개월에 불과했지만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당나라 정부도 당황시킬 정도로 강한 군사력과 함대를 지닌 강대국이었다. 물론 825년부터 세력이 약화되어 육상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인도네시아 일대에서도 그 영향력이 축소되어 영지가 수마트라 섬에 한정지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샤일렌드라가 동남아시아에 끼친 영향력은 단순히 해안 지대를 식민지화 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다. 샤일렌드라의 동남아시아 해안가 진출은 대승불교를 동남아시아 전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일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와트 건축에도 샤일렌드라 불교 건축의 양식이 들어갔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정수가 유지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지를 정복하여 번영했던 샤일렌드라의 위명은 그 왕가가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멸망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가 존재했던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샤일렌드라 왕국은 크메르 제국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강대국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샤일렌드라 왕국과 우리 한반도의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해상 실크로드 복원을 위해서 그 관계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더라도 연구해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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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의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 고고, 인류학적으로 다양하게 조사,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 문화적 체험을 중시하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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