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9
이런 주제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좋은 소리 못들을 줄 알면서도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에 불필요한 줄 알면서도 쓴소리를 뱉겠습니다.
1.
1.
전장연은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를 하면서 아침 출근길과 퇴근길을 골라서 지하철에 탑승을 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이동에 불편함을 겪는 장애인분들의 이야기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출퇴근이나 기타 이유로 인해 본인이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대중교통을 이용 할 뿐인데, 본의 아니게 출발을 지연 시키게 되면서 탑승객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경험이 있다고 말이지요.
이번 시위가 구태여 출퇴근 시간에 벌어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누구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공공시설,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동안 장애인들은 그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 시민을 위해 한산한 시간대에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의무가 없으며, 장애인의 탑승으로 인해 출발이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부족한 배려, 형편없는 설비와 지원이 대중교통의 원할한 운행을 방해하는 것을 주장하는 겁니다.
2.
시민들은 그런 장애인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제는 장애인들이 민폐 끼친다고 하면서 싫어하고 있어요.
이 문장에서 정말 탄식이 나왔습니다. 누가 좋아해 달랬나요?
대게 사람들은 시위의 목적이 시민들에 대한...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게의 사회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특히 그 사안이 소수자성, 소수의 이익과 권익을 다루는 것일수록 여론은 지극히 보조적일 뿐 핵심 요소가 아닙니다.
여론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찬성한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라 라는 요구나, 반대한다, 그들을 저지하라 라는 요구나 결과적으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요구니까요. 어차피 당국은 요구의 전면적 수용도, 전장연에 대한 엄격한 저지도 모두 부담이 따릅니다. 그 사이 어딘가 자신들이 선택 가능한 안을 택하겠지요.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시위와 집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해결이 되어지는 것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도 있지요. 결과가 어찌되든 여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사안은 진행됩니다.
무조건이라는 단어에 불통, 막무가내 등의 의미가 포함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네요. 이 부분은 제 말하기 방식의 불찰이겠지요. 전장연 시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현 전장연 시위의 요구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의 해결주체들과의 소통과 개선 약속입니다. 세부적으로는 곧 있을 국회 예산 심의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예산 확대이지요.
시위 요구에 따른 시위 대상은 관계기관(각종 대중교통 운영 기관), 관계부처(지자체 교통관리과 등), 관계입법기관(국토교통위원회 및 정당) 등입니다.
시위의 기획 의도 및 세부목표는 불편함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그 불편함이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 그로 인한 불편함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담은 당위적 메시지를 대중교통 마비라는 현상과 함께 이를 해결해야 할 주체에게 피력하는 것이지요.
시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시민의 불편함은 불편함 그 자체로 이들 모두에 대한 압박입니다. 시민의 찬성과 응원이나, 반대와 비난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효과를 가집니다.
도리어 대중의 지지만을 목표로 하는 운동은 무척 제한적이 될 뿐더러 실제 그렇게 한들 큰 파급력을 가지지도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더 강하게, 더 극단적으로 행동해야 시선이 모이는 것이 대중 심리니까요.
끝으로 어제 있었던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통대표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미지 따져서는 아무 일도 안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우리라고 현장에 나가는 게 좋겠냐”
“사람들이 불편한 걸 즐기는 건 전혀 아니고, 우리도 미안한 마음과 무거운 마음을 갖고 진행한다”
출처 : 주간조선, 김혜인, 2022.11.10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36)
말 속에 모순이 있네요. 여론이 문제 해결의 핵심요소가 아닌데 왜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힘을 쓸까요?
한때 촛불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호를 기억하시겠지요. 물론 이 명제는 옳습니다. 다만 유의미한 힘을 가질만큼 충분한 권력이 조직될만큼 시민 특히 한국의 시민들은 부지런하지도, 타인과 사회에 관심과 열정이 많지도 않습니다.
시민의 여론이 강력하다는 착각은 시민의 과잉자존감에 근거합니다. 자신이 국가적, 사회적 권력의 한줌을 쥐고있다는 믿음을 붙잡는 것이지요.
여론이, 정확히는 시민 개개인의 의견이 민주주의에서 정말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대국민적 이슈에 따른 시민 중심의 대규모 시위(6.10, 4.19, 5.18, 촞불 등)나 선거 정도 입니다. 소규모 집단의 이익을 다투는 시위에서 시민의 여론은 보조적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첫째,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현재의 시위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그 주관적 불편함이 결코 시위 주체가 침해당해온 기본권을 상회할 수 없으므로 옳지 않으며 둘째, 시위의 방식이 시민의 비위에 거슬리니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애당초 시민에게 애당초 그들을 평가할 권리도 권한도 없으므로 부적절합니다.
최선의 행동은 조력하던지, 응원하던지, 아니면 침묵 뿐입니다. 그외의 선택지는 그 언행이 거칠던 점잖던 공감능력의 부재만 증명할 뿐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여론의 공감이 커졌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야겠지요. 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까? 공감대를 형성한 시민 중 직접적인 촉구행위까지 가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건 얼마나 큰 힘을 가질까요?
여론은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 조건 중 하나일 수는 있으나 절대 필수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만약 여론이 그렇게 큰 힘을 가진다면 많은 사회운동, 소수자운동이 오로지 대중의 공감대만을 목표로 시위를 벌이겠지요. 그러지 않는 이유가 운동 주체들의 판단미스는 결코 아닙니다. 여론이 실질적인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무척 슬프지만 시민의 여론을 조롱하는 '냄비'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토론에서의 매너를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까지 지켜줄 마음은 있지도,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게의 사회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특히 그 사안이 소수자성, 소수의 이익과 권익을 다루는 것일수록 여론은 지극히 보조적일 뿐 핵심 요소가 아닙니다.
여론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도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찬성한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라 라는 요구나, 반대한다, 그들을 저지하라 라는 요구나 결과적으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요구니까요. 어차피 당국은 요구의 전면적 수용도, 전장연에 대한 엄격한 저지도 모두 부담이 따릅니다. 그 사이 어딘가 자신들이 선택 가능한 안을 택하겠지요.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시위와 집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해결이 되어지는 것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도 있지요. 결과가 어찌되든 여론의 무관심 속에서도 사안은 진행됩니다.
무조건이라는 단어에 불통, 막무가내 등의 의미가 포함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네요. 이 부분은 제 말하기 방식의 불찰이겠지요. 전장연 시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현 전장연 시위의 요구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의 해결주체들과의 소통과 개선 약속입니다. 세부적으로는 곧 있을 국회 예산 심의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위한 예산 확대이지요.
시위 요구에 따른 시위 대상은 관계기관(각종 대중교통 운영 기관), 관계부처(지자체 교통관리과 등), 관계입법기관(국토교통위원회 및 정당) 등입니다.
시위의 기획 의도 및 세부목표는 불편함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그 불편함이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사실, 그로 인한 불편함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담은 당위적 메시지를 대중교통 마비라는 현상과 함께 이를 해결해야 할 주체에게 피력하는 것이지요.
시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시민의 불편함은 불편함 그 자체로 이들 모두에 대한 압박입니다. 시민의 찬성과 응원이나, 반대와 비난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효과를 가집니다.
도리어 대중의 지지만을 목표로 하는 운동은 무척 제한적이 될 뿐더러 실제 그렇게 한들 큰 파급력을 가지지도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더 강하게, 더 극단적으로 행동해야 시선이 모이는 것이 대중 심리니까요.
끝으로 어제 있었던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통대표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미지 따져서는 아무 일도 안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우리라고 현장에 나가는 게 좋겠냐”
“사람들이 불편한 걸 즐기는 건 전혀 아니고, 우리도 미안한 마음과 무거운 마음을 갖고 진행한다”
출처 : 주간조선, 김혜인, 2022.11.10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36)
말 속에 모순이 있네요. 여론이 문제 해결의 핵심요소가 아닌데 왜 여론을 설득하기 위해 힘을 쓸까요?
한때 촛불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호를 기억하시겠지요. 물론 이 명제는 옳습니다. 다만 유의미한 힘을 가질만큼 충분한 권력이 조직될만큼 시민 특히 한국의 시민들은 부지런하지도, 타인과 사회에 관심과 열정이 많지도 않습니다.
시민의 여론이 강력하다는 착각은 시민의 과잉자존감에 근거합니다. 자신이 국가적, 사회적 권력의 한줌을 쥐고있다는 믿음을 붙잡는 것이지요.
여론이, 정확히는 시민 개개인의 의견이 민주주의에서 정말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대국민적 이슈에 따른 시민 중심의 대규모 시위(6.10, 4.19, 5.18, 촞불 등)나 선거 정도 입니다. 소규모 집단의 이익을 다투는 시위에서 시민의 여론은 보조적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첫째,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현재의 시위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그 주관적 불편함이 결코 시위 주체가 침해당해온 기본권을 상회할 수 없으므로 옳지 않으며 둘째, 시위의 방식이 시민의 비위에 거슬리니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애당초 시민에게 애당초 그들을 평가할 권리도 권한도 없으므로 부적절합니다.
최선의 행동은 조력하던지, 응원하던지, 아니면 침묵 뿐입니다. 그외의 선택지는 그 언행이 거칠던 점잖던 공감능력의 부재만 증명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