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이야기, 어쩌면 님의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 2화 두 여자의 시작

이웃집퀴어
이웃집퀴어 · 외국기업경영총괄/위기관리 전문
2024/08/04
[오늘 퇴근하고 약속 없으면 여기로 오지 않을래요? 서초구 반포동 94-3] 
아침부터 브라질 법인에서 경쟁사로 추정되는 악성댓글을 현지 메이저 언론이 픽업해서 신제품에 기능적 결함을 지적한 기사가 온라인으로 빠르게 확산중이라는 남미발 태풍을 수습하던 컨콜회의 중 받아본 그녀의 문자. 이런 데이트에 애프터는 좀처럼 없는데, 어제 내가 혹시 평소와 다르게 별난 짓이나 오해할 만한 말을 했든가... 기억을 잃을 만큼 취하지도 않았는데 필름을 다시 돌려봤다. 멀쩡했다, 보통 때의 숨겨진 나였을 뿐이다. 태풍이 지나간 오후 7시, 지치고 목마르고 다시 지친다. 담배도 못 피는데 그보다 독하다는 보헴 No.6라도 한 모금 빨고 싶다는 생각에 왜 그녀의 문자를 다시 보았는지, 그래서 왜 저녁도 안 먹고 동료에게는 둘러댄 채로 서둘러 차키를 뽑아 내려갔는지 모를 일이다. 
   
HOTEL 서래. 호텔?! 호텔이라구? 과로에 찌들어 온 착시현상이 아닌지 무턱대고 방배중학교 근처를 찾은 후 네비게이션을 눌러보고는 당황스러웠다. 업소녀... 절대 아니고, 유부녀... 설마, 혹시... 정말?..... 이따금씩이나마 스무 살 이후 경험을 발휘해 이 상황을 차안에서 삼십 분쯤 헤아리다 배고픔 때문인지 ‘뭔들..’의 심정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단 듯이 전화를 받아든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깝다 했는데 내 뒤 같은 라인에 차를 세우고 선 그녀가 보였다. 하루 만에 마주한 그 얼굴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라도 한 건지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 쓴 채로 나보다 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안 올 줄 알았어. 정말....” 
그래서 우린 두 시간이나 옷도 벗지 못한 채로 침대머리에 앉아서 홈쇼핑을 봤다. 앉아있는 게 지쳐 누운 건지, 눕고 싶어 같이 겹쳐버린 건지.. 태풍을 맞은 까치밥 단감이 떨어져 사방으로 농익은 과즙을 퍼트리듯 두 여자가 만나 섞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날 우리는 나누어 가졌다. 
   
그녀 역시 나처럼 쉐도우(그림자) 레즈비언이었다. 고교 시절 만난 사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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