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4
이문영님이 좋은 글을 써주셨다. 거란의 침입 당시 강조가 이끌던 고려군 30만에 대해서 쓰셨는데 사이비 역사학에 몰두하는 이들은 한반도 같은 작은 땅에서 30만을 동원할수 없으니 고려는 중국에 있다 내지는 만주와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이게 허황됨을 지적하셨다. 이에 필자도 보충을 하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한다.
사실 고려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던 것은 이때만 있던 것이 아니다.
사실 고려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던 것은 이때만 있던 것이 아니다.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하니, 병사가 100,000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었는데, 왕은 그를 상원수로 임명하였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였으며, 내사사인 박종검과 병부낭중 유참을 판관으로 삼아 군사 20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강감찬-
강감찬이 제 3차 거란의 침입이 일어나던 1018년 당시 지휘한 병력이 20만 8300명이였다. 강조가 지휘하던 30만에 근접하지 않더라도 역시 대규모 병력이였다.
강감찬이 제 3차 거란의 침입이 일어나던 1018년 당시 지휘한 병력이 20만 8300명이였다. 강조가 지휘하던 30만에 근접하지 않더라도 역시 대규모 병력이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에 병사를 주둔시켰는데 무릇 17만으로 20만이라고 칭했다.
-고려사 열전, 윤관-
이후 90년이 지난 1108년,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 군대는 17만이였다. 비록 수는 강조, 강감찬이 이끌던 것에 비하면 적으나 역시 대규모 병력인데다 이전과 달리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해 따로 훈련을 거친 별무반이 주축임을 감안하면 고려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지 알수 있다.
이렇게 고려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되었다. ...
이후 90년이 지난 1108년,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한 군대는 17만이였다. 비록 수는 강조, 강감찬이 이끌던 것에 비하면 적으나 역시 대규모 병력인데다 이전과 달리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해 따로 훈련을 거친 별무반이 주축임을 감안하면 고려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지 알수 있다.
이렇게 고려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