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30만 대군 - 우리가 당황한 한국사
2024/02/09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화제죠.
거란이 40만 대군으로 쳐들어올 때, 고려의 군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해 전군을 지휘하게 하는데, 거느린 병사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거란이 40만 대군으로 쳐들어올 때, 고려의 군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해 전군을 지휘하게 하는데, 거느린 병사가 30만 명이었습니다.
以叅知政事康兆爲行營都統使 (중략) 率兵三十萬, 軍于通州, 以備契丹. (고려사 현종세가 원년 10월 1일)
거란은 엄청난 크기의 대제국이니까 40만 군대를 동원할 수 있지만, 고려는 한반도의 작은 나라인데 30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떠오르는 분들이 있더군요. 이러다가 고려가 사실은 중국 땅에 있었다든가, 고려가 압록강 이남에 있는 게 아니라 만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는 등의 헛소리에 빠져들게 될 수 있습니다.
거란의 인구는 중국 학계에서는 거란족은 150만~250만, 거란제국 전체는 900만으로 봅니다만, 비트포겔은 거란족은 75만, 거란제국은 380만 정도로 봅니다. 중국은 거란에게 유린당한 송의 체면을 위해 거란을 더 크게 포장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비트포겔은 고려는 250만~300만으로 추정합니다. 고려의 인구는 <송사> 고려전에 210만 명이라고 나옵니다. 고려가 거란에 비해 그다지 인구가 적지 않습니다. 거란족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더 많죠.
<송사> 고려전의 인구 수는 대략 1130년 경으로 보고 있으므로 고려 거란 전쟁 시기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고려 거란 전쟁을 거치며 인명 피해가 컸을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줄어든 인구일 가능성이 있죠.
거란군의 핵심인 정예 기병은 10만 정도가 직속으로 있었습니다. ...
@노영식 첨언 드리면 고려사 열전의 짤막한 내용이 다입니다. 그나마 최언위와 그 자손들은 고려에서 꽤 활약했고 최언위의 문집은 남은게 없으나 최언위가 비문을 썼다고 알려지거나 글씨를 썼다고 알려진 탑비들이 남아있습니다. 최언위는 글씨도 좋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죠.
최언위의 아들중 거란에 납치된 이후 저 기록 말고 행적을 알수 없는 최광윤 외에 아들이 여럿 있고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최항은 최언위의 손자입니다. 2000년대 사극 제국의 아침에 나온 최행귀는 최언위의 아들입니다.
@je8603800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겠습니다. 전투에 졌다고 병사들이 모두 죽는 건 아니니까요.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현종 원년 11월 24일)
강조의 30만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강조가 대패했는데 사상자가 5만명이라고 나옵니다
@누군가의친구 맞습니다. 유사역사에 빠지는 사람들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 좀 써봤습니다.
최광윤과 광군에 대해서는 몇달전에 제가 올린 것도 있고, 그 글에 개심사지 오층석탑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죠.ㅋ(https://alook.so/posts/LKtajE3) 사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부조를 가지고 형태를 추정할 유물이 전해지지 않는(찰갑 파편 정도뿐인데 찰갑은 시대와 국가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으니 이상할것도 없다만...) 고려전기 갑옷형상을 그렇게 추정하는거죠.
뭐 저는 고려가 동원한 군사 숫자를 보면 한반도의 국가들이 면적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비율을 가졌다고 봅니다. 사실 영토만을 국력으로 착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구도 국력이죠. 그리고 동원된 병력 숫자를 보면 결국 무신정변이 고려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는지 짐작할수도 있죠. 무신정변 이후 고려가 거란의 침입, 윤관의 여진 정벌때만큼의 대군을 동원한 것은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때 개경 탈환시 간신히 끌어모은 20만이후로는 그만한 숫자를 기록한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왕때 위화도회군 당시 공요군이 5만이니 말 다했죠. 심지어 이때는 국가가 동원할 여력의 병력이 없으니 약간이 사병이라도 가진 장수들에게 '원수'칭호를 줄 정도니 말입니다.(황산대첩 직전 발발한 사근내역 전투-사극 정도전에서 짥막하게 나온-에서 '9명의 원수'가 동원되었다는게 이런것) 국가의 동원체계가 확실히 망가져서 고려가 망할때까진 회복이 되지 못했죠.
@노영식 없습니다. 최광윤은 나말여초의 삼최 중 하나인 최언위의 아들입니다.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 붙어서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죠. 그는 거란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명문장가로 일컬어진 최언위의 문집도 남아있지 못하니 그 아들 것은 더더욱 찾을 길이 없을 겁니다. (사족으로 최언위의 시호는 "문영"으로 저와 한자도 같습니다. ㅎㅎ)
잘 봤습니다.
"최광윤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유학을 가 있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학식이 뛰어나 거란의 신하로 발탁되었습니다."
혹시 거란 문물에 대해서 첩보 말고 문집이나 써놓은 것이 있나요?
@je8603800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겠습니다. 전투에 졌다고 병사들이 모두 죽는 건 아니니까요. 고려사절요를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현종 원년 11월 24일)
최광윤과 광군에 대해서는 몇달전에 제가 올린 것도 있고, 그 글에 개심사지 오층석탑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죠.ㅋ(https://alook.so/posts/LKtajE3) 사실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부조를 가지고 형태를 추정할 유물이 전해지지 않는(찰갑 파편 정도뿐인데 찰갑은 시대와 국가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으니 이상할것도 없다만...) 고려전기 갑옷형상을 그렇게 추정하는거죠.
뭐 저는 고려가 동원한 군사 숫자를 보면 한반도의 국가들이 면적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인구비율을 가졌다고 봅니다. 사실 영토만을 국력으로 착각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구도 국력이죠. 그리고 동원된 병력 숫자를 보면 결국 무신정변이 고려를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었는지 짐작할수도 있죠. 무신정변 이후 고려가 거란의 침입, 윤관의 여진 정벌때만큼의 대군을 동원한 것은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때 개경 탈환시 간신히 끌어모은 20만이후로는 그만한 숫자를 기록한 적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왕때 위화도회군 당시 공요군이 5만이니 말 다했죠. 심지어 이때는 국가가 동원할 여력의 병력이 없으니 약간이 사병이라도 가진 장수들에게 '원수'칭호를 줄 정도니 말입니다.(황산대첩 직전 발발한 사근내역 전투-사극 정도전에서 짥막하게 나온-에서 '9명의 원수'가 동원되었다는게 이런것) 국가의 동원체계가 확실히 망가져서 고려가 망할때까진 회복이 되지 못했죠.
@노영식 첨언 드리면 고려사 열전의 짤막한 내용이 다입니다. 그나마 최언위와 그 자손들은 고려에서 꽤 활약했고 최언위의 문집은 남은게 없으나 최언위가 비문을 썼다고 알려지거나 글씨를 썼다고 알려진 탑비들이 남아있습니다. 최언위는 글씨도 좋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죠.
최언위의 아들중 거란에 납치된 이후 저 기록 말고 행적을 알수 없는 최광윤 외에 아들이 여럿 있고 고려거란전쟁에 나오는 최항은 최언위의 손자입니다. 2000년대 사극 제국의 아침에 나온 최행귀는 최언위의 아들입니다.
강조의 30만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강조가 대패했는데 사상자가 5만명이라고 나옵니다
@노영식 없습니다. 최광윤은 나말여초의 삼최 중 하나인 최언위의 아들입니다.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 붙어서 이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죠. 그는 거란에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명문장가로 일컬어진 최언위의 문집도 남아있지 못하니 그 아들 것은 더더욱 찾을 길이 없을 겁니다. (사족으로 최언위의 시호는 "문영"으로 저와 한자도 같습니다. ㅎㅎ)
잘 봤습니다.
"최광윤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유학을 가 있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학식이 뛰어나 거란의 신하로 발탁되었습니다."
혹시 거란 문물에 대해서 첩보 말고 문집이나 써놓은 것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