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을 다시 보지 않기를

김형민
김형민 인증된 계정 · 역사 이야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
2023/03/28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된다. 풍운아이자 조선 말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은 이국 땅 상하이의 호텔 방에서 마흔 넷의 젊은 나이에 그 파란만장한 삶에 종지부를 찍히고 말았다. 김옥균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굵직하게 새겨지게 된 계기는 역시 갑신정변이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에서 벌어진 쿠데타와 이후의 48시간 가량의 개화당 ‘3일 천하‘는 김옥균의 이름을 한국 근대사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게 만든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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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 가운데 일치되는 것은 대단히 머리가 좋고 친화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또르르한 세도가 큰아버지댁 양자로 갔던 것이나 스물 두 살에 과거에 장원급제 (아무리 과거가 엉망이 된 때라 해도 수석 합격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한 것이나 일본 바둑 최고수 혼인보 슈에이와 겨룰 정도였던 바둑 실력 등등 여러 면을 보면 그의 영민함을 넉넉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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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후 일본에서 달갑지 않은 불청객 같은 망명객으로 지내며 조선 정부의 자객에 전전긍긍하면서도 후쿠자와 유키치부터 게이샤들까지 높고 낮은 일본인들을 두루 사귀고 그가 죽은 뒤 그 위패를 모시겠다며 일곱 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나설 정도였으니 인간적 매력이 출중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술 좋아하고 풍류에 능하고 온갖 잡기를 관통하는 호방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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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였던 박영효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렇다. “김옥균의 장점은 사람과의 교유(交遊)다. 참 사람 사귀고 어울리기를 잘했다. 그러나 단점은 덕이 모자라고 모략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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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남이 우습게 보인다. 그리고 주변의 ‘부족한’ 이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모자란 놈들” 일갈하면 그만이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보다는 나의 명철한 견해를 밝히는 시간이 열 곱은 된다. “감히 누굴 가르치려고!” 1시간 회의하면 58분 내가 떠드는 사람이다. 실제로 김옥균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 누구든 그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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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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