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의사와 현대의학의 신화, 프롤로그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2/09
예전에 적은 메디컬에세이의 원고입니다. 대략 단행본 1권 정도의 분량인데 어쩌다보니 출간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적은 메디컬에세이와 비슷비슷한 내용이라 새로운 출판사를 구하는 것보다 얼룩소에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매주 1-2편 정도 올릴 계획입니다. 그럼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프롤로그
   
1.
격렬한 통증이 찾아왔을 때, 남자는 어렴풋이 재앙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난 수 개월 동안 간간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통증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전에 남자를 괴롭혔던 통증이 그저 뻐근거리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거인의 커다란 손이 심장을 움켜쥐어 터트리는 것만 같았다. 식은 땀이 처음에는 이마, 나중에는 등까지 홍건히 고였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왼쪽 어깨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남자는 생각을 바꾸었다. 처음 통증이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직접 운전하거나 택시를 부를 계획이었으나 이제는 구급대에 신고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으며 '가슴통증'이란 단어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곧 요란한 싸이렌과 함께 구급차가 사무실 밖에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이 소파에 반쯤 누운 남자에게 달려왔다. 그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남자를 이동식 침대에 태웠고 빠르게 구급차로 향했다. 그때부터 남자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얼굴에 쓰워진 산소마스크,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 드러낸 가슴에 부착한 심전도 전극, 한층 격렬한 통증과 점차 멀어지는 의식, 남자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죽는구나'란 문장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후회가 몰려왔다. 뻐근거리는 통증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지난 몇 달 동안 병원을 찾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이제 막 중년의 초입에 다다른 나이였으나 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모두 심근경색을 앓은 터라 '고위험군'에 해당했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설마'하는 안일함과 '혹시나'하는 두려움에 병원을 찾지 않았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의 기억은 한층 뒤죽박죽이다. 응급실 침대로 옮겨질 때의 ...
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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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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