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진 · 사회심리학 이론을 덕질하고 있습니다.
2022/05/25
한 무리의 아이들이 공터에서 왁자지껄하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전쟁놀이입니다. 상대방 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이 난무하고, 겁쟁이들과 평화주의자와 병약한 아이들이 그들의 '대장' 에게 닦달을 당하며, 아이들은 상대방의 육체를 폭력적으로 습격함으로써 지배감과 정복감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동료들로부터 단단한 몸(hard body)에 대한 동경과 찬사를 받습니다.

도덕적이고자 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들 노는 걸 보니 약자혐오가 못 봐 줄 수준이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도덕적으로 노는 법을 알려줄게.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이런 말은 하지 말고, 저런 행동은 안 좋으니까 절대 금지야." 백번 지당하고 당연해야 할 우리의 조언을 듣고 나서, 이 놀이는 지속될 수 있을까요? 공터의 뜨거운 열기는 아마도 온데간데없어질 것이고, 모두들 심드렁해져서 떠나갈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드는 것이 부당해 보인다면, 저는 요한 하위징아(J.Huizinga)의 놀이 이론을 빌려온 것이며, 우리나라의 여성주의 철학자인 김선희 교수님도 바로 이 관점에서 최근의 넷페미들의 동향을 비판한 바 있다는 점에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놀이는 그것이 유희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일 때, 자발적이기보다는 계도적일 때, 분위기가 가볍기보다는 무거워질 때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됩니다. 노는 데 훈수 두는 것처럼 눈총을 받기 쉬운 것도 드물다는 점을 떠올리셔도 되겠습니다.

우리가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것' 으로서 이해한다면, 어쩌면 "왜 문화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블랙워싱을 꺼릴까?" 의 질문에 대해서 "그것이 비체이기에 주체들이 공포를 느끼기 때문" 이라는 답변 이외의 대안적 설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흑인 인어공주는 백인 남성들의 유년기 기억을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 간 경계를 무너뜨리는 불가해한 침입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흑인 인어공주가 더 이상 인어공주를 '즐길 수 없게'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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