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리의 아이들이 공터에서 왁자지껄하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전쟁놀이입니다. 상대방 집단에 대한 혐오발언이 난무하고, 겁쟁이들과 평화주의자와 병약한 아이들이 그들의 '대장' 에게 닦달을 당하며, 아이들은 상대방의 육체를 폭력적으로 습격함으로써 지배감과 정복감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동료들로부터 단단한 몸(hard body)에 대한 동경과 찬사를 받습니다.
도덕적이고자 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들 노는 걸 보니 약자혐오가 못 봐 줄 수준이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도덕적으로 노는 법을 알려줄게.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이런 말은 하지 말고, 저런 행동은 안 좋으니까 절대 금지야." 백번 지당하고 당연해야 할 우리의 조언을 듣고 나서, 이 놀이는 지속될 수 있을까요? 공터의 뜨거운 열기는 아마도 온데간데없어질 것이고, 모두들 심드렁해져서 떠나갈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드는 것이 부당해 보인다면, 저는 요한 하위징아(J.Huizinga)의 놀이 이론을 빌려온 것이며, 우리나라의 여성주의 철학자인 김선희 교수님도 바로 이 관점에서 최근의 넷페미들의 동향을 비판한 바 있다는 점에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놀이는 그것이 유희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일 때, 자발적이기보다는 계도적일 때, 분위기가 가볍기보다는 무거워질 때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됩니다. 노는 데 훈수 두는 것처럼 눈총을 받기 쉬운 것도 드물다는 점을 떠올리셔도 되겠습니다.
우리가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것' 으로서 이해한다면, 어쩌면 "왜 문화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블랙워싱을 꺼릴까?" 의 질문에 대해서 "그것이 비체이기에 주체들이 공포를 느끼기 때문" 이라는 답변 이외의 대안적 설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흑인 인어공주는 백인 남성들의 유년기 기억을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 간 경계를 무너뜨리는 불가해한 침입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흑인 인어공주가 더 이상 인어공주를 '즐길 수 없게' 만들어서...
도덕적이고자 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모두를 향해 말합니다. "너희들 노는 걸 보니 약자혐오가 못 봐 줄 수준이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도덕적으로 노는 법을 알려줄게.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이런 말은 하지 말고, 저런 행동은 안 좋으니까 절대 금지야." 백번 지당하고 당연해야 할 우리의 조언을 듣고 나서, 이 놀이는 지속될 수 있을까요? 공터의 뜨거운 열기는 아마도 온데간데없어질 것이고, 모두들 심드렁해져서 떠나갈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드는 것이 부당해 보인다면, 저는 요한 하위징아(J.Huizinga)의 놀이 이론을 빌려온 것이며, 우리나라의 여성주의 철학자인 김선희 교수님도 바로 이 관점에서 최근의 넷페미들의 동향을 비판한 바 있다는 점에서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놀이는 그것이 유희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일 때, 자발적이기보다는 계도적일 때, 분위기가 가볍기보다는 무거워질 때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됩니다. 노는 데 훈수 두는 것처럼 눈총을 받기 쉬운 것도 드물다는 점을 떠올리셔도 되겠습니다.
우리가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것' 으로서 이해한다면, 어쩌면 "왜 문화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블랙워싱을 꺼릴까?" 의 질문에 대해서 "그것이 비체이기에 주체들이 공포를 느끼기 때문" 이라는 답변 이외의 대안적 설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흑인 인어공주는 백인 남성들의 유년기 기억을 구성하는 주체와 객체 간 경계를 무너뜨리는 불가해한 침입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흑인 인어공주가 더 이상 인어공주를 '즐길 수 없게' 만들어서...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만일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하위징아를 언급하시면서 놀이는 대중의 도덕의식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될 때보다 놀이 자체로 남겨져 있을 때, 그럼으로써 놀이하는 자들이 자유로이 즐기게 하고 그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 때 더 유의미할 수 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주신 의견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저는 현재 디즈니사의 작품을 위시한 몇몇 문화콘텐츠가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꽤 당위적인 측면이(“옳기 때문에 그래야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옳다”) 있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천편일률적이고 주입적인 -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계도적인’ - 측면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때 그 콘텐츠는 단순한 문화콘텐츠라기보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가 됩니다. 핵심은 메시지이며, 형식(회화, 시, 소설, 영상, 비디오게임 등)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얄팍해지죠. 또한 그것은 당위적인 도덕으로서 반론을 허락하지 않기도 합니다. 콘텐츠의 핵심이 메시지이기에 어떠한 측면에서든 그 콘텐츠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려 하면 그것이 곧 해당 메시지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되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자가 되어버리니까요.
저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이유는 문화콘텐츠 - 즐길 거리에 메시지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메시지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놀이-예술(하위징아에게는 예술도 놀이의 범주에 들어가겠지요)의 가치와 가능성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워낙 오래 전에 호모 루덴스를 읽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위징아는 놀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닌 여타의 행위 전반으로 확장시키고 그것이 인간 문화의 근간에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사회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갖는다는 말인 동시에 놀이 자체에도 사회문화의 맥락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놀이는 처음부터 이미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맥락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계도하는 자가 끼어들지 않아도 놀이의 참가자들은 이미 놀이를 통하여 특정한 형태의 도덕과 가치를 경험하고 학습하고 있습니다. 즉 규칙 없는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메시지 없는 놀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제는 놀이에서 메시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 잘 가지고 노는가일 것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그 지점입니다. 저는 현재 몇몇 문화콘텐츠에서 블랙워싱이라고 하는 개념이 ‘잘못’ 다루어지고-놀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좀 더 ‘잘’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이 - 그러한 놀이의 규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잘’과 ‘잘못’을 가르는 판단의 기준은 소위 도덕적인 옳고 그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도덕 기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겠지요), 쾌락 자극의 양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기준은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대하여 얼마나 더 큰 잠재력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더 풍부한 상상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상상력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설명을 해보았는데, 납득할만한 설명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시다면 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장문의 댓글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 가져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문득 흘러간 애니메이션의 한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레츠고 형제라는 미니카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거기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충돌합니다.
보수적인 방식으로 속도를 경쟁하는 것을 즐기자 사상.
더 자극적으로 즐기기 위해 미니카에게 무기를 달아서 공격하는 맛을 추가하자는 사상.
후자가 매우 공격적 마케팅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그 세력을 대표하는 아이가 스스로 미니카를 손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지자의 수장이 이해하지 못하고 왜 저런 짓을 하느냐고 한탄하자.
그 지지자의 스승이 말했습니다.
"손댈 필요가 없는 미니카를 받아도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했기에 저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 공격적 마케팅을 하는 팀의 아이들은 승리하기 위해 놀이임에도 즐기지 못하는 결과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기계나 군인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을 강요 받았습니다.
딱 설명하신 놀이이론의 예시에 걸맞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아이는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미니카를 스스로 망가트린 채로 행동한 것입니다.
놀이이론의 예시에 적합하다 생각하여 오래된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만일 제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하위징아를 언급하시면서 놀이는 대중의 도덕의식을 고양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될 때보다 놀이 자체로 남겨져 있을 때, 그럼으로써 놀이하는 자들이 자유로이 즐기게 하고 그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 때 더 유의미할 수 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주신 의견에 상당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저는 현재 디즈니사의 작품을 위시한 몇몇 문화콘텐츠가 소위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꽤 당위적인 측면이(“옳기 때문에 그래야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옳다”) 있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천편일률적이고 주입적인 - 말씀해주신 바에 따르면 ‘계도적인’ - 측면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때 그 콘텐츠는 단순한 문화콘텐츠라기보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가 됩니다. 핵심은 메시지이며, 형식(회화, 시, 소설, 영상, 비디오게임 등)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얄팍해지죠. 또한 그것은 당위적인 도덕으로서 반론을 허락하지 않기도 합니다. 콘텐츠의 핵심이 메시지이기에 어떠한 측면에서든 그 콘텐츠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려 하면 그것이 곧 해당 메시지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되고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자가 되어버리니까요.
저는 이러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이유는 문화콘텐츠 - 즐길 거리에 메시지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메시지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놀이-예술(하위징아에게는 예술도 놀이의 범주에 들어가겠지요)의 가치와 가능성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워낙 오래 전에 호모 루덴스를 읽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위징아는 놀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닌 여타의 행위 전반으로 확장시키고 그것이 인간 문화의 근간에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사회문화가 놀이의 특성을 갖는다는 말인 동시에 놀이 자체에도 사회문화의 맥락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놀이는 처음부터 이미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맥락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계도하는 자가 끼어들지 않아도 놀이의 참가자들은 이미 놀이를 통하여 특정한 형태의 도덕과 가치를 경험하고 학습하고 있습니다. 즉 규칙 없는 놀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메시지 없는 놀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문제는 놀이에서 메시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 잘 가지고 노는가일 것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그 지점입니다. 저는 현재 몇몇 문화콘텐츠에서 블랙워싱이라고 하는 개념이 ‘잘못’ 다루어지고-놀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좀 더 ‘잘’ 가지고 놀 수 있는 방법이 - 그러한 놀이의 규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잘’과 ‘잘못’을 가르는 판단의 기준은 소위 도덕적인 옳고 그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도덕 기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겠지요), 쾌락 자극의 양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기준은 그것이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 대하여 얼마나 더 큰 잠재력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더 풍부한 상상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상상력을 자신의 삶으로 가져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나아갑니다.
어떻게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설명을 해보았는데, 납득할만한 설명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시다면 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장문의 댓글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 가져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문득 흘러간 애니메이션의 한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레츠고 형제라는 미니카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거기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충돌합니다.
보수적인 방식으로 속도를 경쟁하는 것을 즐기자 사상.
더 자극적으로 즐기기 위해 미니카에게 무기를 달아서 공격하는 맛을 추가하자는 사상.
후자가 매우 공격적 마케팅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그 세력을 대표하는 아이가 스스로 미니카를 손상시켰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지자의 수장이 이해하지 못하고 왜 저런 짓을 하느냐고 한탄하자.
그 지지자의 스승이 말했습니다.
"손댈 필요가 없는 미니카를 받아도 아이들은 만족하지 못했기에 저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 공격적 마케팅을 하는 팀의 아이들은 승리하기 위해 놀이임에도 즐기지 못하는 결과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기계나 군인 같은 사고방식과 행동을 강요 받았습니다.
딱 설명하신 놀이이론의 예시에 걸맞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아이는 게임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는 미니카를 스스로 망가트린 채로 행동한 것입니다.
놀이이론의 예시에 적합하다 생각하여 오래된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