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면 백전불태

토마토튀김
2024/04/17
매주 한 번씩 제작사 대표님과 함께 드라마 회의를 한다. 한 달 정도 됐다. 본격적으로 대본 들어가기 전 캐릭터, 에피소드, 구성을 디자인하는 회의다. 드라마 기획 한번 하면서 벌써 수년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쓰면 이제는 지문만 닳을 테고. 

"내가 일제시대 예술가가 된 느낌이야."
갑자기 대표님이 그러신다. 일제시대 예술가? 말이 재미있어서 피식 웃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그저 영화만 고집해 왔고, 어딘가에 꽂히면 앞뒤좌우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것으로만 돌진해 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신다. 뭔가 생각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 느낌. 느낌이 아니라, 생각이 많았다, 대표님도. 나와 같이...

요즘 드라마 시장, '가성비 게임판'이다. 돈이 다들 없다는 거다. 요즘 같은 판국에 12화 이상 넘어가는 것은 모두들 부담스럽다고 한단다. 왜? 판돈이 없으니까. 넷플릭스도 16화 드라마 한 편보다는 8화 두 개 올리는 것을 선호한다. 길게 끄는 것 한 작품보다 짧은 것 두 작품이 구색 맞추기 좋다. 그래야 매주 이번 주 신작! 이러면서 광고도 때릴 수 있고 말이다. 무조건 요즘은 짧게, 짧게... 전체 제작비가 부담이 되면 일단 안 들여다보는 것은 자명하다.  

"작가님, 지피지기면 그다음이 뭔지 알아요?"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 답했다. 
"백전백승이요." 
왜 너무나 당연한 답을 물어보지? 그러나,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을 물어볼 때는 허를 찌를 심산인 것이다. 
"백전백승하면 좋을 것 같아? 어때요?"
오십 년 인생, 불안이 평소 지병이었던 나는 '불안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대표님은 요즘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을 읽고 계신단다. 요즘 '오십에 읽는' 시리즈가 유행인가 보다. 나 또한 '오십에 읽는 주역'과 '오십에 읽는 사기'를 책꽂이에서 빼어든 터라 더더욱. 오십이라는 내 나이. 맹자께서는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게 되는 나이라고 하셨으나, 내가 어떤 명을 받고 태어났는지 먹고 사느라 바빠 알 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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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으며 글을 씁니다. 에세이집 <시나리오 쓰고 있네>, <아무 걱정 없이 오늘도 만두>, <어쩌다 태어났는데 엄마가 황서미>를 발간했습니다. 지금은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를 씁니다. 몰두하고 있습니다. 일 년 중 크리스마스를 제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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