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오리알과 복종하지 않는 남자

곽경훈
곽경훈 인증된 계정 · 작가 겸 의사
2023/03/16
오리알을 먹어라

겉모습은 특별하지 않다. 약간 프르스름한 색깔이 그나마 도드라지는 특징일 뿐, 삶은 달걀과 비슷하다. 그러나 껍질을 벗기면 삶은 달걀과는 완전히 다르다. 매끈한 흰자가 부드럽고 촉촉한 노른자를 품은 삶은 달걀과 달리 껍질을 까면 검은 색과 짙은 갈색이 섞인 기괴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형태 자체는 달걀처럼 타원형인 그 물체를 손가락으로 집어 살펴보면 깃털과 부리를 찾을 수 있고 아직 완전하지 않은 오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은 이 순간 깜짝놀라 '타원형의 물체'를 내려 놓는다. 비위가 약하면 몸서리를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식초와 소금을 조금 뿌린 다음 한 입 깨물면 맛이 나쁘지 않다. 순대를 주문하면 딸려나오는 삶은 돼지간과 비슷한 맛이다. 잘 삶은 돼지간처럼 고소하고 담백하다. 

"자, 이제 발롯을 먹어야지."

20대 후반의 나는 발롯이라 부르는 그 음식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눈에는 장난기가 흘러 넘쳤고 냉소에 입꼬리가 올라갔으리라. 반면에 비닐봉지와 그 내용물을 바라보는 의대생들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당혹이 가득 했다. 깃털과 부리가 씹히는 음식,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아 만든 음식을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 혐오식품이지 않나!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다들 여기에 의료봉사하러 오지 않았어? 오늘 아침까지도 진정한 복음을 모르는 불쌍한 필리핀 사람을 위해 울면서 기도했잖아. 개인적으로 카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필리핀 사람이 복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건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사랑한다면 이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야지. 함부로 복음을 아네 모르네 영혼이 불쌍하네 어쩌네 말하면서 기껏 삶은 오리알 하나 먹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이지."

나의 말에 의료봉사를 인솔한 목사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슬픈 표정으로 발롯, 그러니까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아...
곽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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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메디컬에세이를 쓴 작가 겸 의사입니다. 쓸데없이 딴지걸고 독설을 퍼붓는 취미가 있습니다. <응급실의 소크라테스>, <응급의학과 곽경훈입니다>, <반항하는 의사들>, <날마다 응급실>, <의사 노빈손과 위기일발 응급의료센터>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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