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피로감은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
2023/01/10
전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기에 고속(시외) 버스를 자주 이용한다. 서울에 살 때는 목적지에 따라 아침 일찍 동서울, 센트럴시티, 남부터미널로 향했고 같은 곳으로 돌아오곤 했다. 인구가 10만도 안 되는 지역일지라도 서울로 향하는 버스 몇 대는 반드시 있으니 ‘어딜 가더라도’ 당일치기로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도착한 들, 서울에는 늦은 밤을 책임지는 심야버스가 또 돌아다닌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기본값이었다.
제주로 이사를 하니 서울을 떠난 불편함이 약간은 있지만, 역시나 지역 거점 터미널의 가치를 크게 느낀다. 김해공항에 내려 부산 서부(사상) 터미널로 이동 후 경남 어디론가 가고, 광주공항에서 터미널(유스퀘어)로 가면 전남의 구석구석으로 가는 버스가 즐비하다. 기차가 갈 수 없는 곳까지 버스는 방방곡곡 종횡무진이다. 덕분에 나는 먹고산다. 어디든지 이동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기본값이어서.
기본값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휠체어를 이용하여 고속버스를 탄 장애인을 본 적이 없다. 작가 생활 십여 년이면 천여 번은 전국의 터미널을 이용했을 거다. 한 번도, 한 번도 휠체어가 45인승 버스의 앞문을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갓난아기도, 100세는 되어 보이는 노인도 보았다. 불편한 정도는 다르겠지만 세대 간 차별이 없는 게 버스다.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이들도 투덜거리면서 시외버스를 탄다. 옷차림새에서부터 고단함이 묻어나는 이들은 오르자마자 잠든다. 계층에 따라 사용 빈도 차이는 있겠으나 진입장벽은 비교적 평등하다. 성, 인종, 종교, 외모에 따른 차별도 드러나지 않는다. 버스의 이치는 간단하다. 탈 사람은 돈만 내면 누구든지 탄다. 돈을 안 내면 누구라도 탈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가? 평등함 넘실거리는 대중교통이지만, 누군가에는 아무리 돈을 내겠다고 한들 거대한 벽일 뿐이다. 경사는 90도, 높이는 바벨탑 수준이다. 자신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는 자와, 바퀴에 의지해야 하는 자의 기본값은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고속(시외) 버스는 전국에 단 7대다(비마이너. 2022. 3. 12, “‘장애인 시외이동권 전면 부정’ 8년 만의 대법원판결. 강혜민 기자).
다른 교통은 무탈한가? 과거보다 나아졌을 뿐이지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은 전투다. 지하철 탑승을 위해 지하로 안전하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도, 짐짝처럼 ‘리프트’로 이동하다가 떨어져 사망한 사람이 ‘여럿’ 발생하면서 지금 수준으로 설치되었다.
그럼 해결이 되었나? 그 많은 출구 중 몇 곳에만 엘리베이터가 있을 뿐이다. 이조차도 단번에 내려가는 건 별로 없다. 노인들 틈새에 기다렸다가 겨우 한층 내려가고 이동해서 유모차의 아기와 눈높이를 함께 하며 다시 내려간다. 지하철 타기 전까지의 소요 시간이 비장애인의 몇 배다.
출근시간대에는 휠체어가 있을 공간도 없는데, 설사 그 안에 들어간들 눈치가 보인다. 어떤 비장애인도 출근하다가 마주친 옆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이번 역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주의” 하라는 방송이 나오면 대부분이 아래로 한 번 슬쩍 보는 게 유일한 수고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면 다르다. 바퀴가 걸릴 걱정에 초조해진다. 빠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두려워진다. 단지 열차에서 ‘내리는 것’만으로도 긴장한다. 사람 사는 거, 결코 다 같지 않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휠체어를 이용하여 고속버스를 탄 장애인을 본 적이 없다. 작가 생활 십여 년이면 천여 번은 전국의 터미널을 이용했을 거다. 한 번도, 한 번도 휠체어가 45인승 버스의 앞문을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갓난아기도, 100세는 되어 보이는 노인도 보았다. 불편한 정도는 다르겠지만 세대 간 차별이 없는 게 버스다.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한 이들도 투덜거리면서 시외버스를 탄다. 옷차림새에서부터 고단함이 묻어나는 이들은 오르자마자 잠든다. 계층에 따라 사용 빈도 차이는 있겠으나 진입장벽은 비교적 평등하다. 성, 인종, 종교, 외모에 따른 차별도 드러나지 않는다. 버스의 이치는 간단하다. 탈 사람은 돈만 내면 누구든지 탄다. 돈을 안 내면 누구라도 탈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가? 평등함 넘실거리는 대중교통이지만, 누군가에는 아무리 돈을 내겠다고 한들 거대한 벽일 뿐이다. 경사는 90도, 높이는 바벨탑 수준이다. 자신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는 자와, 바퀴에 의지해야 하는 자의 기본값은 그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한 고속(시외) 버스는 전국에 단 7대다(비마이너. 2022. 3. 12, “‘장애인 시외이동권 전면 부정’ 8년 만의 대법원판결. 강혜민 기자).
그럼 해결이 되었나? 그 많은 출구 중 몇 곳에만 엘리베이터가 있을 뿐이다. 이조차도 단번에 내려가는 건 별로 없다. 노인들 틈새에 기다렸다가 겨우 한층 내려가고 이동해서 유모차의 아기와 눈높이를 함께 하며 다시 내려간다. 지하철 타기 전까지의 소요 시간이 비장애인의 몇 배다.
출근시간대에는 휠체어가 있을 공간도 없는데, 설사 그 안에 들어간들 눈치가 보인다. 어떤 비장애인도 출근하다가 마주친 옆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이번 역은 열차와 승강장 사이가 넓으니 주의” 하라는 방송이 나오면 대부분이 아래로 한 번 슬쩍 보는 게 유일한 수고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면 다르다. 바퀴가 걸릴 걱정에 초조해진다. 빠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두려워진다. 단지 열차에서 ‘내리는 것’만으로도 긴장한다. 사람 사는 거, 결코 다 같지 않다.
이동이 제한되면 사람은 위축된다. 나오기가 두렵기에 학습 의지가 사라지고 이는 고스란히 개인의 역량을 결정한다. 이동권의 차이는 그 자체가 기회와 과정과 결과의 불평등으로 반드시 이어진다. 장애인이라서 ‘그런 건’ 없다. 하지만 장애인이 ‘이동을 비장애인처럼 하지 못해서’ 그런 건 있다.
이 결과를, 결과 이전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별을 쏙 빼버리고 멋대로 판단하면 나쁜 고정관념이 된다. 의기소침은 잘못된 사회의 결과이지만, 누구는 그걸 원인으로 이해하고 ‘왜 열심히 살려고도 하지 않냐’면서 빈정거린다. 편견이 가득하면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일련의 정책들, 이를테면 장애인 특별전형이나 장애인 의무고용 등의 해법은 왜 능력도 없는 사람에게 자리를 주냐, 나는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공정하지 않다 등등의 말들과 겹쳐지며 순항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한 ‘나’는 평생 이동에 대한 고민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거지만 당연하게 주어진 기본값은 특별하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비장애인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장애인을 배제한 설계로부터 시작되었음은 망각된다. 지하철 정시 도착에는 출근 시간에 휠체어 이용자가 단 한 명도 탑승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실제 일상은 그런 당당한 차별을 연료로 돌아가지만,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이러하니 이동권 시위는 멈춰지지 않는다. ‘버스업체는 장애인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수년이 지나도 변화는 요원하다. 기만적인 조치도 많았다.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하라는 권고에 회사가 가능한 보조도구를 배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 있었다. 버스 ‘안’은 그대로였다. 좌석을 개조하여 공간을 확보하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원고들이 향후 탑승할 구체적·현실적 개연성이 있는 노선으로 한정하여, 휠체어 탑승설비를 단계적으로 설치하라”는 대법원 판결은(2022년 3월) 슬프다. 향후 탑승할 노선을 어떻게 한정한다 말인가? 목적지가 생길 때마다 소송을 하고 이겨야지만 이동이 가능하단 말인가. 장애인들은 한곳에서라도 살아야 하나?
이런 논란이 등장하면 ‘이용하는 장애인도 별로 없는데 다 바꿔야 하나?’라는 차별적 인식이 논리적인 주장처럼 등장한다. 이 말과, ‘해외에 나가보니 장애인이 많아서 놀랐다’는 감상평은 밀접히 연결된다. 설마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기질적으로’ 집 밖에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런 차이가 발생했겠는가?
“원고들이 향후 탑승할 구체적·현실적 개연성이 있는 노선으로 한정하여, 휠체어 탑승설비를 단계적으로 설치하라”는 대법원 판결은(2022년 3월) 슬프다. 향후 탑승할 노선을 어떻게 한정한다 말인가? 목적지가 생길 때마다 소송을 하고 이겨야지만 이동이 가능하단 말인가. 장애인들은 한곳에서라도 살아야 하나?
이런 논란이 등장하면 ‘이용하는 장애인도 별로 없는데 다 바꿔야 하나?’라는 차별적 인식이 논리적인 주장처럼 등장한다. 이 말과, ‘해외에 나가보니 장애인이 많아서 놀랐다’는 감상평은 밀접히 연결된다. 설마 한국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기질적으로’ 집 밖에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런 차이가 발생했겠는가?
원래의 시스템이 간절히 원했던 반응
변화의 ‘느림’과 비례하여 장애인의 항의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도 발생한다. 출근길 지하철이 지연되면 난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시위 초기, 난감함을 같은 분노의 크기로 반사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그저 ‘묵묵히’ 기다렸고 ‘알아서’ 목적지로 가는 우회 방법을 찾은 이들이 다수였다. 소극적으로나마 연대 의사를 표한 것이었다. 시위의 방법이 욕먹을 일인지 따지는 것보다, 욕먹을 걸 알면서도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거다.
이 반응을 제대로 해석하고 사회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확장하는 게 정치다. 물론, 한국에는 없었다. 장애인이 공공시설을 붙잡고 있는 현상 A와 공공 이용을 방해받았음에도 즉각적으로 따져 묻지 않은 비장애인의 태도 B는 견고한 차별을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개선하라는 같은 메시지다.
하지만 A ‘때문에’ B가 발생한 게 사실 아니냐고만 우겨대면 논의는 갈라치기 싸움이 되어 진흙탕에 빠진다. 한 정치인은 ‘차별이 응축된 현장’을 시민들을 ‘볼모’로 하는 비문명 불법시위라며 비난했다. 정치인이 판을 깔아주니 경찰 간부는 “지구 끝까지 찾아가 사법처리하겠다”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짜증 나면 짜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라’는 신호나 마찬가지이니 평범한 커뮤니티에서도 불쑥불쑥 사실과 의견을 빙자한 혐오 표현이 등장한다. 언론은 이걸 또 여론이랍시고 받아들여, 논쟁을 촘촘하게 따져 묻는 본래의 역할은 포기한 채 논란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니, 책임감을 지녀야 할 조직과 사람들은 안심하며 시위가 던진 질문에 답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법과 원칙 운운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시위하는 ‘이들을’ 처리할 방법만을 지독하게 찾는다.
그러니 시위가 멈춰질 수가 없는데, 이거야말로 그들이 원했던 결과다. 시위로 인한 불편함이 지속될수록, 시위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집단적 피로감이야말로 ‘차별을 전제로 설계된 원래의 시스템이’ 간절히 원했던 반응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이제 슬쩍슬쩍을 넘어 과감하게 말을 뱉을 거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친절하지 않으면 외면받는다고, 더 세련된 고민이 필요하다고 등등.
설마 그렇게 안 했겠는가.
** 이 글은 필자의 기존 칼럼 ("장애인 이동권 시위, 시민들은 볼모였을까" -<SRT 메거진>. 2022년 5월 호)를 수정 및 추가했습니다.
드라마 우영우가 생각 나네요!
진심으로 장애인 처우가 지금보다 좋아지길 바랍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방송을 해대며 이들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못된 사람들이 미울 뿐입니다...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해서, 특히 글 후반부는 가장 제 생각과 비슷한 글 같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선생님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사회를 보고 읽는 제 시선을 만들어 준 책 중 하나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해서, 특히 글 후반부는 가장 제 생각과 비슷한 글 같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선생님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사회를 보고 읽는 제 시선을 만들어 준 책 중 하나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방송을 해대며 이들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못된 사람들이 미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