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I) - 폴리비오스(Polybios)의 '역사(Historia)'

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1/05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수 만의 대군과 코끼리 수십 마리를 거느리고 초겨울에 알프스를 넘어간 위업은 지금까지도 찬사를 받습니다. 저만 해도 소시적에 제 2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는 기억 못 했어도 한니발은 기억하고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작 어느 경로로 알프스를 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고대부터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현대에도 논의가 완전히 종결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서가 전혀 없지는 않고, 현대 역사가들이 현장에서 단서를 모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높은 길은 두 개로 압축된 상태입니다. 단서 중에는 당시의 1차 사료들인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역사(Historia)'와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Livius)의 '로마사(Ab urbe condita)'가 있습니다. 원전을 직접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파파고나 구글 번역 등을 사용할 수 있으니 이미 공개된 영어 번역을 해석해 보죠. 자동 번역을 일단 한 후 영어와 비교 점검했습니다.
  '역사' 중 제 3권의 40~57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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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이탈리아 전경
40] 그리하여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건너려고 시도하는 동안, [로마인들은] 고개들에 있는 갈리아족의 지형적 이점을 상당히 두려워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에 보낸 사절들로부터 [전쟁] 결정에 대한 설명과 [전쟁 개시 통고] 연설이 있었음을 한니발이 에브로(Ebro) 강을 군대와 함께 건널 것이라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알았다. 그 때문에 로마인들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를 스페인으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Tiberius Sempronius Longus)를 아프리카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군단을 꾸리고 다른 준비를 하는 동안 그들은 그들이 결정한 식민지를 키살피나 갈리아(Cisalpina Gallia)에 세우는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그들은 성읍들을 요새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각 도시마다 약 6천 명의 식민지 주민들에게 30일 이내에 그 자리에 도착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이 포 강의 이쪽에 세운 한 도시는 플라센티아(Placentia)라고 부르고, 건너편의 다른 도시는 크레모나(Cremona)라고 이름 붙였다. 오랫동안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팽개치기 위해 납작 엎드려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회를 찾지 못했던 보이(Boii) 갈리아족들이, 카르타고인들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확신에 내가 이전 책에서 설명한 지난 전쟁의 끝에 보냈던 인질들을 포기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로 이 두 식민지가 설립됐다. 로마에 대한 오랜 원한 때문에 쉽게 지지를 얻은 인수브레스(Insubres)족에게 합류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은 로마인들이 그들의 식민지에 할당한 땅과 도망치는 정착민들을 압도하고, 로마의 식민지인 무티나(Mutina)까지 추격한 후 그곳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포위된 사람 중에는 식민지의 분할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고위직 남성 3명인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Gaius Lutatius)와 두 명의 전직 법무관이 있었다. 보이족과의 협상을 요청한 이 세 사람에 대해 보이족은 동의했지만, 그들이 협상을 위해 나왔을 때 그들은 [로마에 있는] 인질을 되찾기를 바라며 배신하여 그들을 포로로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루키우스 만리우스(Lucius Manlius)는 부근에 군대와 함께 있었으므로, 서둘러 구원하려 진군했다. 보이족은 그의 접근을 알았고, 숲에 매복하여 그가 도착하자마자 사방에서 그를 공격했고, 많은 로마인들을 죽였다. 나머지는 처음에는 도망쳤지만, 더 높은 곳에 도착하자 그들의 퇴각이 질서정연해 보일 정도로 집결했다. 보이족은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 비커스 타네티스(Vicus Tannetis)라고 불리는 곳에서 로마군을 포위했다. 제4군단이 보이족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는 즉시 그 법무관의 지휘하에 푸블리우스에게 주어질 군단들을 보내어 지원하게 했했고, 푸블리우스에게 동맹국들로부터 다른 군단들을 징병하라고 명령했다.

   * Placentia = 현대의 Piacenza, Cremona는 현대명과 동일, Mutina = 현대의 Modena.
   * Vicus Tannetis = 현대의 Parma 바로 동쪽
   * 키살피나 갈리아; 현대의 알프스 바로 남쪽의 이탈리아 영역. 반도 부분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라 생각하면 무방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훗날 한니발을 격파하게 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 후에 스페인에서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Cnaeus Cornellius Scipio Calvus)와 함께 전사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한 다음에도 계속 집정관급 사령관으로 활약.
 
구글 지도; 이탈리아 북부(당시 Cisalpina)의 서쪽과 프랑스 남부

41] 처음부터 한니발이 도착할 때까지 갈리아 문제의 상태와 과정은 내가 여기와 이전 책에서 설명한 바와 같았다. 두 로마 집정관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여름 초에 출항하여 작전을 수행하였고, 푸블리우스는 60척의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는 160척의 5단 노선(quinquereme)을 타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것들로 그는 대단한 규모의 원정을 꾸리며 릴리바이움(Lilybaeum)에서 모든 종류의 병력을 모아 엄청나게 준비했고, 카르타고로 항해하여 즉시 그곳을 포위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푸블리우스는 리구리아를 따라 해안을 따라 5일 만에 피사에서 마르세유(Marseille) 근처에 도착했고, 론(Rhône) 강 첫 입구에 – 마르세유 어구로 알려졌다 - 닻을 내려 군대를 상륙시켰는데, 이 때는 한니발이 이미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한니발 사이는 갈리아 부족의 수와 그 나라가 [행군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전히 며칠 거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갈리아족에게 일부에는 뇌물, 다른 부족에게는 무력으로 통과하여, 사르데냐 해를 자신의 오른쪽으로 하여 론 강의 나루목에 뜻밖에도 군대와 함께 나타났다. 푸블리우스는 적의 도착을 보고받고,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이미] 진격했으리라 생각해 불신했고, 부분적으로는 정확한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참모진이 적에게 전투를 거는 편이 가장 좋으리라 권했지만 행군 후 그 자신이 군단과 피로를 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용감한 기병 300명을 출전시켰다. 이들은 마르세유에 용병으로 복무하던 갈리아족을 길 안내 겸 지원병으로 받았다.

  * 이전 책; Historia의 앞 부분
  * Lilybaeum = 현대의 Marsala (시칠리아 섬 서쪽 끝)
  * 마르세유; 원문에는 Massalia.

42] 강 근처에 도착한 한니발은 즉시 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바다에서 약 4일 거리에 있는 시냇물이 하나뿐인 곳을 건너 기슭을 건너기 시작했다. 론 강둑의 많은 사람들이 해상 교통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는 강둑 주변의 주민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들의 카누와 보트를 모두 샀다. 그는 또한 갈리아인에게 카누를 만들기에 적합한 통나무를 얻어서 이틀 동안 그는 무수한 양의 나룻배를 모았고, [군대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 없이 최선을 다하고 건너갈 기회를 자신이 마련했다. 그 사이에 카르타고군이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야만인들이 반대편 둑에 모였다. 한니발은 이를 보고, 모든 방향에서 공격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강력한 적 앞에서 강제로 건너가기도, 그렇다고 도하를 미루기도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도착한 후 3일째 밤에 군대의 일부를 보내 현지 가이드를 제공하고 한노(Hanno)의 지휘하에 두었다. 그들은 강둑을 200 스타디아 거슬러가 개울이 갈라지며 섬을 이루는 곳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즉시 손에 넣을 수 있는 목재를 사용하고 통나무를 못질하거나 밧줄로 묶어서 곧 필요한 충분한 수의 뗏목을 만들었고, 아무런 저지 없이 안전하게 건넜다. [지형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의 노력 후 그 날 휴식을 취하면서, 그들이 명령받은 기동을 준비하기 위해 머물렀다. 게다가 한니발은 그와 함께 남아있는 병사들처럼 [한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어떻게 37마리의 코끼리를 [강 건너로] 건넬 것인가였다.

  * 한노; 카르타고의 장로회에서 선출한 의장(suffete; 여러 모로 공화정 로마의 집정관 consul 과 비슷)이었던 보밀카르(Bomilcar the Suffete) 의 아들
  * 스타디아; stadion의 복수. 1 stadion = 185m.  200 stadia = 37km.

43 ] 그러나 다섯째 날 밤, 이미 건너온 군대는 동트기 조금 전에 그곳의 야만인들을 상대로 반대편 둑을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그의 병사들을 준비시키고 건널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트를 경기병으로 채우고 카누는 가장 경무장한 보병으로 채웠다. 큰 배들은 가장 상류에, 가벼운 나룻배들은 더 하류에 놓였기 때문에, 물살의 주요 힘을 받는 무거운 배들일수록 카누들은 건널 때 위험에 덜 노출되어야 했다. 그들은 보트가 물살을 가르는 동쪽으로 말들을 끌고 가려 하고, 선미 양쪽에 한 명씩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선두 고삐로 서너 마리의 말들을 안내하여, 첫 번째 시도에서 많은 수가 한꺼번에 건너갔다. 적의 계획을 본 야만인들은 카르타고군이 상륙하는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흩어져 질서 없이 그들의 진영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니발은 그가 이전에 보낸 병력이 반대편 둑에 가까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미리 알려준 대로 연기를 내 접근을 알렸고, 거룻배의 모든 책임자들에게 승선하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즉시 복종했고, 이제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서로 노력하며 소리치며 물살을 막으려고 애썼다. 양군은 강 바로 옆의 양안에 서 있었고, 카르타고인들은 배의 진행을 따라가며 무서운 긴장감으로 크게 환호했으며, 야만인들이 전투 함성을 지르며 전투에 도전하는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고 스릴이 넘쳤다. 이 순간, 야만인들이 텐트에서 나왔을 때, 멀리 강가에 있던 카르타고인들은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공격했고, 일부가 적의 야영지에 불을 지르는 동안, 대부분은 통로를 지키던 사람을 공격했다. 야만인들은 불의에 기습을 받아 일부는 텐트를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갔고, 다른 일부는 자신을 방어했다. 한니발은 그가 의도한 대로 모두 유리하게 굴러가자, 그의 부하들 중 가장 먼저 강을 건넌 사람들을 즉시 집결시켰고, 몇 마디 격려를 한 후 야만인들을 상대하게 했다. 갈리아인들이 무질서했으며 그 상태에서 기습받았기 때문에, 곧 돌아서 도망쳤다.

44 ] 그리하여 카르타고 장군은 통로를 장악하고 적을 물리친 후, 즉시 반대편 둑에 남겨진 사람들을 데려오는 데 몰두했고,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의 모든 군대는 강 옆에 진쳤다. 다음날 아침, 로마 함대가 론 강 어귀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500기의 누미디아(Numidia) 기병대를 보내 적의 행방과 수,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찰했다. 동시에 그는 코끼리들을 건너게 하는 임무를 [부하에게] 맡긴 후 병사들을 소집하고, 마길루스(Magilus)와 포 평원에서 그에게 온 다른 족장들을 소개하면서, 그 부족들의 결정이라고 알려온 것을 통역을 통해 알렸다. 그들의 연설에서 군인들을 가장 격려한 것은 첫째로 이탈리아로 그들을 초대하고 로마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약속한 갈리아인들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존재였고, 둘째로 그들이 고난에 시달리지 않으며 이탈리아로 안전하고 빨리 안내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이었다. 덧붙여 갈리아인들은 그들이 가는 나라의 풍요로움과 넓이, 그리고 로마의 군대와 맞서려는 사람들의 열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갈리아인은 이런 의미로 말을 마쳤으며, 한니발 자신은 앞으로 나와 과거에 그들이 이룬 업적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병사들에게 그의 계획과 조언을 따랐을 때 그들이 많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고 잘못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그는 병사들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을 이제 성취했음을 고려하여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려운] 도하 작업을 힘으로 이겨냈고, 갈리아 부족의 우호적인 정서 및 동맹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눈과 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신의 일인 세부 사항에 대해서 안심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용감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과거 병사들이 해 온 기록에 걸맞은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청했다. 사람들이 큰 열정과 열정을 보이며 그에게 박수를 치자, 한니발은 그들을 칭찬하고 모두를 대신하여 신들에게 기도를 드린 후, 그들을 해산시키고 다음날 행군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신속하게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 누미디아; 현대의 알제리.

45 ] 이 모임이 끝난 후, 정찰을 위해 파견된 누미디아 기병들이 돌아왔을 때, 대부분이 없었으며 나머지는 달아나서 돌아왔다. 진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푸블리우스가 같은 목적으로 내보낸 로마 기병과 만났으며, 둘 다 영웅적으로 싸웠다. 로마인들과 갈리아족들은 약 140명의 기병을, 누미디아 기병은 200명 이상을 잃었다. 그 후 로마인들은 카르타고 진영 가까이까지 추격했고 조사한 후, 집정관에게 적이 도착했다고 보고하기 위해 서둘렀으며,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했다. 푸블리우스는 즉시 짐을 배 위에 놓은 채 카르타고군과 교전하려 전군을 강둑으로 진군시켰다.
  모임 다음날, 한니발은 기병대를 바다 쪽으로 전진시켜 엄호하게 한 다음, 보병대를 진영 밖으로 이동시켜 행군에 내보내고, 코끼리들과 함께 남겨진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들이 코끼리들을 건너게 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46 ] 그들은 매우 견고한 뗏목을 여러 척 만들고, 이것들 중 두 척을 묶어서 강둑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들의 전체 너비가 약 50피트(≒15m)이다. 이들에 다른 것들을 더 멀리 붙여서, 다리를 개울로 뻗었다. 그들은 전체 구조물이 물살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도록, 나무에 고정한 밧줄로 물살을 마주보는 쪽으로 구조물을 고정했다. 그들이 약 200피트 길이의 뗏목 다리나 부두 전체를 만들었을 때, 끝 둘은 매우 단단하게 고정했으나 나머지는 쉽게 끊어질 수 있는 밧줄로 연결했다. 그들은 이 몇 개의 예인선에 배를 매달고, 하류로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물살을 거슬러서 지탱하여, 안에 실은 코끼리들을 건넬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그들은 모든 뗏목 라인에 많은 양의 흙을 쌓았고, 전체가 도하점으로 이어지는 강안의 길과 같은 높이로 만들었다. 동물들은 항상 조련사들의 말을 들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조련사들은 [흙이 쌓인 뗏목 위로] 코끼리들을 몰았고, 이들은 맨 앞에 배치한 두 암컷을 순순히 따랐다. 코끼리들이 마지막 뗏목에 발을 디디자마자, 다른 뗏목과 이은 밧줄이 잘리고, 배들이 팽팽하게 당기고, 동물들이 서 있는 뗏목들이 흙더미에서 빠르게 당겨졌다. 처음에 매우 놀란 동물들은 돌아서서 사방으로 뛰어다녔지만, 그들은 마침내 두려움에 떨며 조용히 있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구조물의 끝에 두 뗏목을 계속 붙여서, 코끼리 대부분을 건네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는 너무 놀라서 반쯤 건너던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들을 움직이던 조련사들은 모두 익사했지만, 코끼리들은 구조되었다. 코끼리들은 코의 힘과 길이 덕에 물 위로 내밀어 숨을 쉬며 동시에 입으로 들어가는 물을 내뿜었고, 그들 대부분은 걸어서 강물을 건넜다.

  * 피트; 로마 피트(pedes). 29.6cm로 현대의 영미 피트의 97.6%. 거의 같다.

47 ] 코끼리들이 건너간 후, 한니발은 동물들과 기병대를 이끌고 후위에 배치하고, 유럽의 중심을 향한 것처럼 바다 반대인 동쪽 방향으로 강둑을 거슬러 올라갔다. 론 강은 알프스의 북쪽 경사면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머리에서 북서쪽으로 솟아올라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사르디니아 해로 나간다. 강 경로의 대부분은 깊은 계곡을 통과한다. 그 중 북쪽에는 갈리아 부족 아르디예스(Ardyes)가, 반면 남쪽에는 알프스의 북쪽 사면이 전체 범위이다. 내가 위에서 길게 설명한 포(Po) 강 평원은 이 산맥의 높은 주요 줄기에 의해 론 계곡과 분리되어 있다. 마르세유에서 시작되는 이 산맥들의 주요 줄기는 아드리아 해의 머리까지 뻗어 있다. 한니발이 론 계곡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위해 지금 건너온 것은 이 줄기이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지나온 이 행적을 묘사한 작가들 중 일부는 이 산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희망 때문에, 진정한 역사에 가장 이질적인 두 왜곡을 저지른다. 그들은 거짓 진술과, 서로 모순되는 진술을 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기와 선견지명의 장군으로 한니발을 기술하면서도,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를 전적으로 신중함이 결여되었다고 묘사하며, 자신들을 거짓의 풀 수 없는 미로로 몰아넣어 진실한 역사에 신들과 영웅들을 들여와 매듭을 끊게 만든다. 알프스가 너무 가파르고 험준하여 코끼리를 동반한 말과 군대뿐 아니라 도보로 이동하는 활동적인 사람들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동시에 어떤 신이나 영웅이 한니발을 만나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면 그의 전 군대는 길을 잃고 완전히 죽었다는 황량한 모습을 그려낼 것이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의 두 가지 왜곡에 빠진다.

48 ] 한니발이 그렇게 많은 군대를 지휘하면서, 그에게 작전의 성공이 완전히 좌우되는데, 행군로, 나라들의 위치, 경로 선택, 그가 이끌 사람들, 무엇보다 떠맡은 일에 대한 실제적 지식을 모른 채 있다면, 장군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들은, 성공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높은 시점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절망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거의 하지 않을 것을 하는 한니발을 대표한다 – 그것은, 자신들과 군사들을 미지의 나라에 맡기는 것이다. 또한, 그 지역의 황량함과 급격한 경사, 접근하기 어려운 특성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신뢰도가 떨어짐을 명백히 할 뿐이다. 먼저, 그들은 한니발이 오기 전에 몇 번 있던 일인, 론 계곡의 갈리아족이 근래 알프스를 큰 규모의 군대로 넘어서 이미 말했듯이 파두스 계곡의 갈리아족과 연합하여 로마인과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둘째, 그들은 알프스 산맥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무지로 인해 영웅이 한니발에게 길을 알려줬다는 주장으로 피신한다. 사실 그들은 개연성 없고 불가능한 줄거리로 시작하여 어려움을 해결하고 극을 끝내기 위해 기계신(Deus ex machina)을 데려올 의무가 있는 비극 작가들과 같다. 이러한 역사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전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초자연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터무니없이 시작하니 터무니없는 결말만이 나온다. 물론 한니발은 이 작가들의 말처럼 행동하진 않았지만, 반대로 최대한 신중하게 그의 계획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침공하려는 나라의 풍요로움과 로마에 대한 주민들의 적대적 감정에 대해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알렸고, 통과할 어려운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지 안내인과 탐사인들을 고용했다. 나는 이에 대해 자신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 여기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했고, 진실을 확인하고 내 눈으로 보기 위해 [관계된] 나라를 조사하고, 알프스 고개를 직접 넘었기 때문이다.

* 기계신; 고대 그리스 극에서 작가의 임의대로 극에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던 장치. 문자 그대로 아무 것이나 다 할 수 있고, 현대 관점에서는 개연성을 떨어뜨린다.

49 ] 이제 로마 집정관 푸블리우스는 카르타고인들이 떠난 지 3일 만에 도하점에 도착했고, 그들이 원주민들의 수와 통치를 안 받아온 성격 때문에 절대로 이 길로 이탈리아로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기 때문에, 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극도로 놀랐다. 그것을 알자마자 전속력으로 배로 돌아와 군대를 배에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그의 형(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Gnaeus Cornelius Scipio Calvus)을 스페인에 보내 원정을 지휘하게 하고, 에트루리아(로마 서북쪽)를 지나 빠르게 진군하여 적보다 먼저 알프스 산맥 기슭에 도달하려 이탈리아를 향해 항해했다.
  한니발은 4일 동안 도하점에서 꾸준히 행군하면서 인구가 많고 곡물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인 ‘섬’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그 지역의 양쪽을 따라 흐르는 론 강과 이세르(Isère) 강이 그 지점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이 섬은] 이집트 삼각주와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나일 삼각주는 나일강의 두 지류가 합쳐지는 바다가 기준선이지만, 반면에 여기서는 기준선이 사람들이 거의 오르거나 지나가기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하는 산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다르다. 거기 도착하자마자, 두 형제가 그들의 [갈리아 부족] 군대와 서로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으며, 형이 그에게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한니발은 동의했는데, 현재 상황에서 이것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와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쫓아내어, 승리자에게 큰 도움을 얻었다. 그는 군대에 곡물과 다른 식량들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오래되고 낡은 무기들을 모두 새것으로 대체했고, 전 군에 큰 편의를 베풀었다. 그는 또한 군사들 대부분에게 따뜻한 옷과 신발을 공급했는데, 그들에게 산맥을 건널 때 가장 중요한 가능한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그 중 중요한 것은, 카르타고인들이 그들이 알로브로게스(Allobroges) 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쉽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갈리아] 군대로 후방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카르타고인들이] 고개의 기슭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

  * 알로브로게스 족; 알프스 서쪽 론 강 유역에 살던 부족. BC 2세기 후반에서 1세기 초반에는 결국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50 ] 이세르 강둑을 따라 800 스타디아(≒148km) 거리를 열흘 동안 행군한 후, 한니발은 알프스의 등반을 시작했고, 매우 큰 어려움에 처했음을 알았다. 그들이 평지에 있는 동안, 여러 알로브로게스 족장들은 기병과 그들을 호위하는 야만인들을 두려워하며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호위 야만인들이 귀환하기 시작하고 한니발의 군대가 어려운 지역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자, 알로브로게스 족장들이 상당한 병력을 모으고, 카르타고군이 어쩔 수 없이 지나야만 하는 경로 상의 유리한 위치를 점령했다. 그들이 계획을 비밀로 유지했다면, 카르타고군을 완전히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그대로 카르타고군에게 노출되었고, 그들이 한니발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입은 손해가 더 컸다. 카르타고 장군은 야만인들이 이러한 중요한 위치를 장악한 것을 알고 나서 고개 기슭에 진을 치고, 그곳에 남아 적의 계획과 전체 상황을 정찰하고 보고하기 위해 그의 갈리아족 정찰대원 몇을 미리 보냈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대로 수행한 정찰대원들은 적이 있음을 알려왔는데, 적은 낮에는 가장 엄격하게 그들이 점령한 자리에 머물렀지만, 밤에는 이웃 마을로 물러났다. 한니발은 여기에 계책을 내 다음처럼 움직였다. 전군을 이끌고 공공연히 전진했고, 적으로부터 멀지 않은 [통과가] 어려운 지점에 다다르자 진영을 쳤다. 밤이 되자마자 그는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고, 군사 대부분을 그곳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군대 치중을 가볍게 한 병사들을 이끌어 도로의 좁은 부분을 지나, 마을로 평소처럼 물러난 적이 버린 진지들을 점령했다.

51 ] 대낮에 적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고 처음에는 계획을 포기했지만, 다음에 수송용 동물들과 기수들이 좁은 길을 따라 길게 대오를 지어 천천히 오르는 것을 보고, 행군을 괴롭히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들이 여러 다른 지점에서 공격하면서,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했다. 주로 말과 수송용 노새를 많이 손실했는데, 야만인들의 공격이 아니라 지형 때문이었다. 고개를 오르는 길은 좁고 고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파르기 때문에, 가장 조금만 움직이거나 방해만 해도 많은 동물들을 짐과 함께 벼랑 위로 밀어냈다. 상처를 입자마자 혼란을 야기하고 그 중 일부가 고통에 놀라 돌아서 다른 동물들에게 달려가며, 좁은 길에서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밀어붙여 큰 혼란을 야기한 것은 주로 말이었다. 한니발은 이것을 보고, 수송대가 큰 손실을 입으면 전투에서 벗어난 군인들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밤에 높은 곳을 점령한 대열의 선두에 도움을 주려 자신이 선두로 갔다. 그는 높은 지대에서 공격하여 알로브로게스족에게 큰 손실을 입혔지만, 행군 대열이 참가자들의 함성과 전투로 인해 양편에서 한꺼번에 더 큰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카르타고군에게도 똑같이 손실이 컸다. 위험한 곳에서 크게 어려움을 겪어 가며 말과 수송대의 나머지를 진정시킨 것은 겨우 알로브로게스족 대부분을 칼로 몰아붙이고 나머지를 강제로 그들의 근거지로 도망치게 했을 때였다. 한니발 자신이 전투 후에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집결시켜 공격했고, 적들이 공격을 하기 위해 출발한 마을을 발견하였다. 그는 모든 주민들이 약탈하려 나왔기 때문에 거의 인적이 없음을 알고 탈취했다. 이것은 당장의 수요뿐 아니라 뒤에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많은 수송 동물들과 말 및 같이 생포된 사람들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2~3일 동안 충분한 곡물과 소를 공급받았고, 더군다나 오르막 근처에 있으며 카르타고를 공격하려 했던 다음 부족들이 아무도 그를 건드릴 생각을 못 하도록 공포심을 주었다.

52 ] 한니발은 여기서 잠시 숙영하기로 결정하고, 하루를 머무른 후에 행군을 재개하였다. 그 다음에는 어느 지점까지 군대를 안전하게 지휘하였으나, 나흘째에 다시 큰 위험에 처하였다. 고개 근처의 선주민들은 공모하여 배신할 뜻을 품고, 우리 그리스인들이 전령의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야만인들이 우정의 증표로 사용하는 올리브 가지와 화환을 들고 맞으러 나왔다. 한니발은 그런 동맹 제안에 대해 약간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과 일반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들이 한니발에게 잘못을 저지르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의 도시의 점령과 파괴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 이유로 전투나 부상을 유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왔다고 확언했고, 인질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말을 불신하며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부족들이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려면 더 신중하고 더 평화를 선호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거절한다면 분명히 공개적인 적이 될 것임을 고려하여 그는 마침내 그들의 제안에 동의했고, 우정을 받아들이는 척했다. 야만인들이 그 때 인질들을 인도하고 그에게 소를 많이 제공하며, 자신의 처분을 한니발에게 기꺼이 맡기자, 그는 그들을 다음 어려운 길의 안내자로 삼을 정도로 그들을 신뢰했다. 그러나 이틀 간의 행군 후에 이 야만인들은 카르타고군의 뒤를 따라 그들이 어렵고 가파른 협곡을 횡단하고 있을 때 그들을 공격했다.

53 ] 한니발이 여전히 주의하여 그런 긴급 상황을 고려해 수송대와 기병을 대열의 선두에 배치하고 중무장 보병을 후방에 배치하지 않았다면, 카르타고 전 군은 완전히 궤멸되었을 것이다. 보병이 그 때 공격의 정면에서 엄호해 주었기 때문에 재앙은 덜 심각했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사람들, 수송 동물들과 말들을 잃었다. 언덕을 따라 고지에서 있던 적은 바위를 굴리거나 손에서 돌을 던져 카르타고인들을 극도의 위험과 혼란에 빠뜨려서, 한니발이 기병과 수송대의 전진을 엄호하기 원했음에도, 노출된 바위로 방어막을 삼고 병사들이 밤새 노력한 결과 간신히 구출해 낸 기병과 수송대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다음 날, 적들이 떠난 후, 그는 기병대와 수송 동물들과 합류하여 고개 정상으로 갔다. 이제 더 이상 야만인들의 대규모 병력과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일부는 지형을 이용하여 후방이나 전방에서 그를 공격하고 무리를 이룬 동물들 중 일부를 탈취했다. 이 상황에서 코끼리들은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적은 코끼리들이 있는 대열 부분에 처음 보는 모습의 이상함에 겁을 먹어 감히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흐레 동안 산을 오른 후에 한니발은 정상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이틀 동안 생존자들에게 휴식을 주고 낙오자를 기다려 야영했다. 이 기간 동안 공포에 질려 도망친 많은 말들과 무리를 벗어난 많은 수송용 동물들이 행군 자취를 따라 야영지로 놀랄 만큼 많이 돌아왔다.

54 ] 때가 플레이아데스 성단에 가까웠기 때문에 정상에 이미 눈이 쌓여 있었고, 한니발은 병사들이 지금까지 고통받았고 고통받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기분이 침체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원기를 북돋우려, 그는 병사들을 집합시켜 산맥 아래에 실제 가까운 이탈리아의 광경을 보게 했다. 알프스 산과 이탈리아를 함께 볼 때, 성채가 도시에 접해 있듯이 알프스가 이탈리아 전체에 면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포 평원을 보여주고 거주하는 갈리아인들의 우호적인 감정 및 로마의 상황을 지적하면서, 그는 병사들의 의지를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다음날 그는 야영지를 철거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몇 은밀한 약탈자들을 제외하고는 적들과 마주치지 않았으나, 지형의 어려움과 눈 때문에 손실이 거의 오르막에 필적했다. 내리막길이 매우 좁고 가파르며, 사람과 짐승 모두 눈 때문에 무엇을 밟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잘못 밟거나 구르기만 하면 모두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시기에 그러한 고통에 익숙했기 때문에 참았지만, 마침내 그들은 길이 극도로 좁아 코끼리나 무리의 동물들이 지나갈 수 없는 곳에 도달했다. 이전의 산사태가 산 표면 약 1.5 스타디아(약 280m)를 쓸어냈고, 최근에 다시 산사태가 나자 군인들은 다시 한번 낙담하고 용기를 잃었다. 카르타고 장군은 처음에 우회로로 어려운 부분을 피하려 생각했지만, 새로 내린 눈으로 전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 ‘on the setting of the Pleiades’; https://www.persee.fr/doc/rbph_0035-0818_1984_num_62_1_3447 에서 보듯이, ‘겨울이 되어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황소자리의 플레이아데스 성단은 겨울에 보인다.

55 ] 상황은 완전히 특이하고 통상을 벗어났다. 이전 겨울부터 남아 있던 오래된 눈 위에 내린 새로운 눈은 부드럽고 신선했으며, 아직 깊지 않았다. 하지만 새 눈 위를 밟으면 아래에 있는 얼어붙은 눈을 만나 더 빠지지 않고 두 발로 미끄러졌다. 비슷한 일이 진흙을 뒤집어쓰고 땅 위를 걷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 다음이 훨씬 더 힘들었다. 사람들이 딱딱한 아래 층을 밟아 넘어진 후 무릎과 손으로 일어서려 할 때, 아래 층 위에서 가파른 비탈을 타고 훨씬 더 빨리 미끄러졌다. 그러나 동물들은 넘어졌을 때 아래 층을 깼기 때문에, 올라가려 할 때 그들의 짐이 마치 그 안에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그 경로로 갈] 계획을 포기하고, 한니발은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눈을 치우고, 다음에는 병사들에게 절벽을 따라 길을 만들기 위해 매우 힘든 일을 시켰다. 하루 동안 수송대와 말들이 통과하는 데 충분히 넓은 길을 만들었다. 그는 즉시 통과하여 눈이 없는 땅에 진을 치고, 그들을 목초지로 보냈으며, 다음에 누미디아 인들을 교대시켜 길을 건설했다. 그래서 큰 어려움을 겪고 그는 3일 만에 코끼리들을 통과시킬 수는 있었으나, [코끼리들은] 굶주림 때문에 비참한 상태였다. 알프스의 정상과 고개 꼭대기 근처의 모든 부분은 겨울과 여름 모두 계속되는 눈 때문에 나무가 없고 헐벗었지만, 양쪽 절반의 사면은 풀이 무성하고 숲이 우거져 전체적으로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

  * 첫 문단은 리비우스 쪽이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56 ] 한니발은 이제 모든 병력을 모아 계속 하산했고, 방금 설명한 절벽에서 3일간의 행군으로 평지에 도달했다. 그는 도하 때와 평상의 행군에서 적의 손에 의해 많은 병사를 잃었고, 알프스의 절벽과 어려움은 많은 병사뿐 아니라 훨씬 많은 수의 말과 수송용 동물들을 희생시켰다. 그는 뉴 카르타고에서 [알프스 기슭까지] 행군하는 데 5개월이 걸렸고, 알프스를 넘는 데 보름이 걸렸으며 , 그래서 그가 대담하게 포 평원과 인수브레스족의 영토로 내려갔을 때, 그 자신이 [나중에] 라키니움(Lacinium)의 기둥에 병력에 대해 새겼듯이, 그의 생존 병력은 아프리카 병사 12,000에 스페인 병사 8,000, 최대 6,000의 기병이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비슷한 시기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형 그나이우스에게 스페인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하스드루발과 적극적으로 전투하라는 명령을 건네주고,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해로로 피사(Pisa)에 도착했다. 에트루리아를 지나 보이족과 교전 중인 법무관의 최전방 군단을 인수한 그는 포 평원에 도착했고, 진영을 건설하며, 적을 기다리며 전투를 고대하고 있었다.

* 한니발은 BC 206년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이탈리아 남단 콜론나 곶(capo Colonna)의 헤라 신전 기둥에 자신의 행적을 청동판에 새겨 박았다. 병력 묘사도 전부 여기 적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진다.

57 ] 이제 내 이야기, 전쟁, 그리고 두 장군을 이탈리아로 가져왔으니, 전투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이 책에서 내 방법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싶다. 내가 말한 대부분이 아프리카와 스페인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에 있는 지중해 입구, 또는 외해(outer sea)와 그 특성들, 아니면 영국 제도와 [거기서] 주석을 얻는 방법, 스페인에 있는 금광과 은광 등, 작가들이 길게 논쟁해 온 문제들을 전혀 말하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내 주제와 이질적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독자들을 실제 주제에서 산만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며, 다음으로 그런 문제에 산발적으로 암시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진실한 설명을 주기 위해 특별히 대우해 적절한 장소와 시간을 할당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역사의 과정에서 그러한 지역에 도달했을 때, 내가 여기서 그 이유로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않으면, 아무도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언급할 수 있는 각 장소에 대한 그러한 설명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모든 것을 맛보는 저녁 파티에 참석한 미식가가 그런 경우에 많이 해당됨을 모르는 것이다. 식탁에 현재 오른 어떤 음식도 진정으로 즐기거나 미래에 유익한 영양분을 얻을 만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독서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현재의 즐거움이나 미래의 이익을 제대로 얻지 못한다.

* 헤라클레스의 기둥은 현재의 지브롤터 해협이며, 이보다 서쪽 대서양은 바다 괴물 얘기가 나오는 등 신비하게 여겼다. 당시에도 영국은 섬이라 알려져 있었으며, 청동에 필요한 주석은 거기서 채굴해 거래되었다. 스페인의 광산은 카르타고가 지배하면서 큰 수입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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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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