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탐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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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탐구생활

그들은 'MZ 세대'라는 덫을 놓고 있다.

오찬호
2023/02/15
대학원 시절이었던 2000년대 중후반, 386 세대의 생애를 추적하는 연구를 했다.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386 세대 담론이 2000년, 2004년 총선을 거치면서 가장 활발해진 시기였다. 세미나 때마다, 1980년대에 ‘강렬한 정치적 경험을 강력히 공유했던 이들을’ 20년이 지나서도 동일한 범주로 묶을 수 있는지를 매번 토론했다. 세대를 간단명료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논의는, 상투적이지만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세대‘론’의 운명이었다.
   
주제는 두 가지로 양분되었는데 하나는 세대 내에 다양한 층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엘리트 대학생’이라는 부분을 전체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다른 하나는 ‘경험이 동일하더라도’(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대학생활), 모두가 이 토대 위에 생애사를 차곡차곡 쌓으며 가치관을 정립하는 건 아니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그 연령대의 아무개에게 386 세대라는 특징은 자신을 설명하는 수십 개의 키워드 중 하나인데, 쉽게 대표성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세대론의 허점을 찾는 질문이었지만, 386세대는 담론의 파이가 꽤나 컸고 농도는 진했다. 언론에서 만든 단어에 불과하다, 학자들의 설명도구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기에는 생명력도 파급력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486 세대가 되었어도, 586 세대로 불리면서도 한국사회 한가운데서 (좋든 나쁘든)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한다. 
   
세대의 응집력이 한때의 특별했던 순간에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그 덩어리를 굴리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현상이다. 시작은 동년배 안에서의 작은 조각이었을 거다. 작지만 강력했다. 목적의식 뚜렷한 정치적 세대로서 조각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명명되어’ 주목받고, 시시때때로 ‘호출되어’ 의미 있게 다뤄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일부가 전체 덩어리를 움직이는 구심력이 되어 파도를 만든다. 옆에 있는 조각들도 덩달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며 서로 끌어주고 밀어준다. ‘지금까지도’ 정치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서 여론의 생산자이자 확장자로 386 세대가 여전히 힘을 보여주는 이유다. 정체불명의 세대 이름만 나부끼는 세상이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386 세대만큼 또렷하게,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세대는 뭉쳐져 굴러가며 시대를 관통한다
   
X 세대도 덩어리의 힘이 큰 편이다. 1970년대에도 통기타, 블루진, 생맥주가 청년의 상징이라는 이야기를 언론이 만들었지만 정치 상황을 외면하는 ‘가벼운 논의’라면서 동년배 내부의 구심력까진 작동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으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었던 엄중했던 시절 아니었던가. 

이 관념에 균열이 생긴 게 1990년대다.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의 개인들은 시대를 고민해야만 하는 무거움을 (약간) 내려놓고 자신에게 (최소한 80년대보다는) 솔직해지려고 했다. 
   
당시의 1020 세대들은 그 시기와 맞물려 외연이 확장된 대중문화를 함께 공유하면서 서로들 사이에 흐르는 동질성을 ‘동년배 의식’으로 키워나갔다. 지금의 커피문화와 비슷하다. 한국인들이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커피전문점이 이렇게 많은 건지, 아니면 카페공화국에 살다 보니 커피도 좋아지게 된 것인지 헷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과 영화를 ‘기질적으로’ 더 사랑하는 인간이 별안간 그 코호트에만 증가할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대중문화 빅뱅의 시대가 주는 혜택을 듬뿍 누렸다. 
   
그 경험은 잊을 만하면 ‘1990년대’라는 이름으로 호출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은 특정 세대의 향수가 일반적인 추억 수준보다 짙었다는 증거다. 그 시절을 주름잡았던 가수들을 소환하는 음악프로그램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90년대 음악만 틀어주는 술집도 있다. 

한번 뭉쳐진 세대‘론’은 X 세대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디지털에 익숙하고 개성을 존중하며 문화의 의미를 중요시 여긴다는 X 세대 설명처럼, 많은 이들이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X세 대의 슬로건을 의식하고 삶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맞추었다. 그렇게 어떤 세대는, 그게 이름뿐이라는 비판이 있든 말든 뭉쳐지고 굴러가며 뚜벅뚜벅 시대를 관통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지 따지는 걸 떠나 X 세대는 존재한다. X 세대 정체성은 실재한다. 
   
MZ 세대‘론’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MZ 세대‘론’도 마찬가지로 굴러가고 있다. 여기저기서 이 세대의 특징을 설명하고 행보를 분석 중이다. 게다가 이 세대의 아래에 ‘불안’이 깔려있다고 할수록 이전 세대의 문제점이 도드라지고, 그건 586 세대가 대표했던 진보 정치권을 공격하는 이유가 된다.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건 ‘공정’이라고 강조할수록 진보의 폐쇄성이 선명하게 부각되니 이 셈법으로 정치적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쪽에선 조각을 커다란 덩어리처럼 부풀리는 일반화를 서두른다.
   
우리나라의 언론지형을 고려할 때 이 경향은 앞으로 더 노골적일 거다. MZ 세대 노조라고 검색하면 대기업 사무직/관리직 ‘위주의’ 노조가 세대를 대표하고 또 관심받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걸 통해 ‘드러나는 건’ 비정규직 노동자 조롱과 노조 멸시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투쟁을 정치적이라고 매도하는 논리가 대단한 것처럼 부유한다. 이런 정서가 이 세대의 ‘사실’이라고 언론은 부각한다. 시대의 흐름인양 높이 평가한다.이런 명명과 호명이 구심력의 연료가 되어 2030 세대 다수가 자신들을 MZ 세대로 이해하고 행동할 때 무슨 일이 발생할까? MZ 세대‘론’에 자신을 맞추어 그 덩어리가 정말로 커지면 어떤 사회적 ‘좋은’ 효과가 있을까? 
   
MZ 세대론에는 “그래, 난 X 세대니까 문화를 즐기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성이 내포한다. 386 세대, X 세대가 시간이 흘러도 세대 ‘내’ 동질감이 유지되면서 민주주의와 대중문화라는 키워드가 계속 발전된 것과는 다르다. 

MZ 세대는 ‘능력 있는 자가 대우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가 전부인 매우 위계화된 서열을 바탕으로 분열될 가능성이 크다. 세대가 뭉쳐, 세대가 찢어지고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우리라는 말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사라진다. 위쪽은 자신들의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아래쪽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체념한다. 
   
경제적 자유라는 달달한 말은 이들을 더 찢어놓는다. 경제적 자유인이 되었다는 소수의 MZ 세대를 언론들은 기어코 찾아내어 다른 이들도 같은 판에 뛰어들도록 유도한다. 성공한 예외는 문제를 은폐한다. 그런 방법으로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좋겠다만 불가능하다. 세대 내 양극화만 심해질 것이다. 따질 수도 없다. 이 세대의 철학이 바로 경쟁에 승복하는 공정 정신 아닌가.

비극이다. MZ 세대가  도드라진 건 세대 ‘간’ 불평등이 원인인데, 세대 ‘내’ 불평등이 결과라니 말이다.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이득을 보는 세력들이 지금도 곳곳에 MZ 세대라는 덫을 놓고 있다 386 세대와 X 세대가 '진짜' 세대가 된 것처럼, 차별에 찬성하는 세대가 미래를 관통하길 기대하면서. 걸리지 마시라.
MZ 세대론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 픽사베이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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