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성착취' 생존 피해자 8명, 활동가들의 속내

김성호
김성호 인증된 계정 · 좋은 사람 되기
2024/05/08
한국인이라면 일본군 위안부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막판 독일, 이탈리아와 삼각동맹을 체결하며 추축국으로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을 소화한 일본이 식민지에서 강제로 동원한 성착취 피해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현지 주둔부대에 붙들려 군인들의 성욕을 푸는 도구로 소모됐던 정신대 위안부 중 상당수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를 분노케 했다. 심지어 그중 대다수가 자신이 향후 겪을 일을 알지 못한 채로 속아서, 혹은 강제로 붙들려 위안부가 되었단 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생존자들이 제가 겪은 일을 외부로 알리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야 했던 세월은 얼마나 길었는가. 그 사실을 알린 뒤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제들은 또 얼마나 지난한 것이었나.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저 숨죽이고 물러나 있지만은 않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공식석상에 나와 최초로 피해증언을 했고, 활동가며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시위가 이뤄지기도 했다. 전 세계로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알린 김복동 할머니의 평화활동은 영화로 만들어져 큰 파급을 일으켰고, 나눔의 집과 평화의 소녀상 등 관련된 활동들이 시민들의 지지와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피해자가 앞장서고 활동가가 꾸리며 시민들이 지지해온 이 같은 활동은 그 자체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일제의 만행에 분연히 맞서는 한국인의 결기를 알도록 했다.
 
▲ 할머니를 만나는 날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끝나지 않는 싸움, 위안부 피해 투쟁의 현실

이 같은 투쟁의 결과일까. 피해자 일부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 제기한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고등법원은 지난해 말 원심을 뒤집고 원고 청구금액을 모두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외국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는 게 부당하다고 판결해 논란이 된 원심을 뒤집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여론과 재판 등 다방면에서 일본정부를 압박해왔던 피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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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서평가, 작가, 전직 기자. 저널리즘 에세이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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