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사라진 역사책을 찾아서 - 구삼국사
2024/02/24
<삼국사기> 이전에 삼국시대 역사를 쓴 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아마도 <삼국사>였을 것인데, <삼국사기>와 혼동이 있을 듯하여 이것을 옛날 삼국사라는 뜻으로 <구(舊)삼국사>라고 부른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이 책을 <구삼국사>라 불렀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가 <동명왕편>에서 <구삼국사>를 보았다고 썼다. 참고로 <삼국사기>는 1145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만든 후에도 <구삼국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간혹 나오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만들고 나서 다른 사료를 다 불태웠다는 말이 헛소리인 이유이다.
그럼 <구삼국사>는 언제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이름이 "삼국사"인만큼 신라 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정훈 교수(해당 논문 작성 시점에 연세대 연구교수)가 이 점에 흥미로운 연구를 보여준 바 있다. 이정훈 교수는 <삼국사기>의 태봉 관제에 나오는 "지금(今)"의 용례를 분석해서 이때 사용된 "지금"의 시점이 목종 2년(999)부터 현종 2년(1011)까지라는 점을 밝혔다. 이...
이미 고려시대에도 이 책을 <구삼국사>라 불렀다. 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가 <동명왕편>에서 <구삼국사>를 보았다고 썼다. 참고로 <삼국사기>는 1145년에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김부식(1075~1151)이 <삼국사기>를 만든 후에도 <구삼국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간혹 나오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만들고 나서 다른 사료를 다 불태웠다는 말이 헛소리인 이유이다.
그럼 <구삼국사>는 언제 어떻게 작성된 것일까? 이름이 "삼국사"인만큼 신라 때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정훈 교수(해당 논문 작성 시점에 연세대 연구교수)가 이 점에 흥미로운 연구를 보여준 바 있다. 이정훈 교수는 <삼국사기>의 태봉 관제에 나오는 "지금(今)"의 용례를 분석해서 이때 사용된 "지금"의 시점이 목종 2년(999)부터 현종 2년(1011)까지라는 점을 밝혔다. 이...
@누군가의친구 그 삼국유사가 임란 때 약탈 당해서 도쿠가와 막부에서 소장하다가 구한말에 최남선에 의해서 재발행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문영 두 전란이 아니였으면 오늘날 역사 연구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더불어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개각이 이뤄져 찍어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날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으니 개각을 주도한 이들에게 매우 감사할뿐입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발문을 보면 조선초에 온전히 한질로 남기 어려웠다고 하니 정말 큰일이죠. 특히 중종때 경주부윤 이계복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개각한 것은 이토록 비용이 드는데도 후일을 위해 큰 일을 한 것입니다.
@누군가의친구 이때 받은 충격과 임란 때 한양 도성이 불타고 사고들이 다 파괴된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구삼국사 소실은 안타깝지만 현종때 만들었을 가능성 많이 생각할만하죠. 애초 현종때 사료소실이 심각했는데 제가 일전에 얼룩소에 올린 전쟁으로 인한 기록의 소실에서 고려사 내용 언급하면서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臣) 정인지가 교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고려의 선대는 기록이 빠져 자세하지 않다.'는 정인지의 서술에서도 드러나죠.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조도 전쟁이 나기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님에도 22개조만 전해지고 나머지는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거나 강감찬, 왕가도가 성종때 과거 급제하고도 현종때까지 뭘 했는지 기록이 없다던지 훈요 10조가 알려진 계기등을 생각하면 상당한 피해를 봤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구삼국사가 현종 이전의 사료라면 이런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봤을테니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가 굳이 구삼국사를 참고하면서 그렇게 사실 부분을 누락할 이유도 없으니 애초 원전이라 할 구삼국사도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대규모 사료 소실로 참고할 사료가 부족하여 그정도 밖에 쓸수 없었다고 볼수도 있죠.
@노영식 맞습니다. 고유어가 한자어로 어떻게 바뀌는지 알려주는 자료라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죠.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 개명은 고대어 연구에 소중한 자료입니다.
@누군가의친구 그 삼국유사가 임란 때 약탈 당해서 도쿠가와 막부에서 소장하다가 구한말에 최남선에 의해서 재발행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문영 두 전란이 아니였으면 오늘날 역사 연구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텐데 말이죠. 더불어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개각이 이뤄져 찍어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날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으니 개각을 주도한 이들에게 매우 감사할뿐입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발문을 보면 조선초에 온전히 한질로 남기 어려웠다고 하니 정말 큰일이죠. 특히 중종때 경주부윤 이계복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개각한 것은 이토록 비용이 드는데도 후일을 위해 큰 일을 한 것입니다.
@누군가의친구 이때 받은 충격과 임란 때 한양 도성이 불타고 사고들이 다 파괴된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구삼국사 소실은 안타깝지만 현종때 만들었을 가능성 많이 생각할만하죠. 애초 현종때 사료소실이 심각했는데 제가 일전에 얼룩소에 올린 전쟁으로 인한 기록의 소실에서 고려사 내용 언급하면서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신(臣) 정인지가 교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고려의 선대는 기록이 빠져 자세하지 않다.'는 정인지의 서술에서도 드러나죠.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조도 전쟁이 나기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님에도 22개조만 전해지고 나머지는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되거나 강감찬, 왕가도가 성종때 과거 급제하고도 현종때까지 뭘 했는지 기록이 없다던지 훈요 10조가 알려진 계기등을 생각하면 상당한 피해를 봤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구삼국사가 현종 이전의 사료라면 이런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봤을테니 전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삼국사기가 굳이 구삼국사를 참고하면서 그렇게 사실 부분을 누락할 이유도 없으니 애초 원전이라 할 구삼국사도 거란의 침입으로 인한 대규모 사료 소실로 참고할 사료가 부족하여 그정도 밖에 쓸수 없었다고 볼수도 있죠.
@노영식 맞습니다. 고유어가 한자어로 어떻게 바뀌는지 알려주는 자료라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죠.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 개명은 고대어 연구에 소중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