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그 불확정성에 대하여
2024/10/14
학부 시절 친했던 양반 중에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탐독하는 경제학과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민속학을 공부하면서 문화변동의 사회구조적인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회학을 복수전공했었고요, 그 친구는 마르크스주의를 좋아했기에 사회학을 복수 전공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의 사회학과가 비판사회학회에서 주축이 되는 교수도 많았던 곳인지라, 커리큘럼을 따라가다 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한 번씩 거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20대 초반의 열의와 곁들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호의적이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하간 이 친구와 만나게 된 것은 4학년 때 팀플을 하면서였는데, 그때는 이미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많이 식고 '의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학구적인 사람이 잘 없는 2010년대의 대학가에서 서로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알아봤기에 친해질 수 있었죠.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토마 피케티 이야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친구의 열의도 듣고, 아, 이 친구는 계급 문제에 대해서 진심이구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도 간간히 연락과 만남을 이어나가며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 민주당의 PC주의에 대한 과도한 관심, 토마 피케티 교수의 이에 대한 비판 등을 흘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 친구는 계급 문제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싶었습니다.
2016년 대선 국면에서부터 이 친구는 계속 이재명 지지자였습니다. 저는 뭐, 그때부터 이재명 씨의 과격한 발언들에 동의하기 어려운 면모가 많이 있고, 과도한 진영 가르기 식의 발언이 있다는 데에 비호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소득 구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2017년 춘계 문화인류학회의 아젠다가 기본소득이었고, 그 시절 많은 인류학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저는 2021년~2022년 정도의 기간을 빼곤 비호의적이었습니다.
어쨌든, 기본소득 때문에 이재명 씨를 지지하는구나. 그게 계급 문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에 ...
제가 다녔던 대학의 사회학과가 비판사회학회에서 주축이 되는 교수도 많았던 곳인지라, 커리큘럼을 따라가다 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한 번씩 거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20대 초반의 열의와 곁들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호의적이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하간 이 친구와 만나게 된 것은 4학년 때 팀플을 하면서였는데, 그때는 이미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은 많이 식고 '의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학구적인 사람이 잘 없는 2010년대의 대학가에서 서로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알아봤기에 친해질 수 있었죠.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토마 피케티 이야기도 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친구의 열의도 듣고, 아, 이 친구는 계급 문제에 대해서 진심이구나,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대학원 시절에도 간간히 연락과 만남을 이어나가며 트럼프의 당선과 미국 민주당의 PC주의에 대한 과도한 관심, 토마 피케티 교수의 이에 대한 비판 등을 흘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아, 이 친구는 계급 문제를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는구나, 싶었습니다.
2016년 대선 국면에서부터 이 친구는 계속 이재명 지지자였습니다. 저는 뭐, 그때부터 이재명 씨의 과격한 발언들에 동의하기 어려운 면모가 많이 있고, 과도한 진영 가르기 식의 발언이 있다는 데에 비호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본소득 구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2017년 춘계 문화인류학회의 아젠다가 기본소득이었고, 그 시절 많은 인류학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저는 2021년~2022년 정도의 기간을 빼곤 비호의적이었습니다.
어쨌든, 기본소득 때문에 이재명 씨를 지지하는구나. 그게 계급 문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느꼈습니다. 그리고 나에 ...
@유영진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제가 문제 의식을 갖는 부분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도 깊이 연관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계급이라는 것을 나누는 기준이란 상당히 애매하기 마련입니다만, 저에게 있어서는 지금 당장의 소득보다는 이 이중구조에서 윗단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아랫단에 속한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게 된다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수출로 인한 경제성장을 염두에 두고 발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수출 대기업의 정규직, 그리고 이외에 전문직, 아니면 공무원, 교사와 같이 안정적인 직업 생활을 할 수 있는 부류가 있고, 내수에 종사하는 기업, 아니면 대기업에 납품하는 업체의 직원,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출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혜택은 이중구조의 윗단에 속한 사람이 얻게 되며, 상당히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20년(요새는 이마저도 짧아지고 있지요...) 정도 누리면서 연봉이 점차 높아질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도 존재하죠. 연봉이 계속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 회사도 언제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지 미지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이러한 이중구조의 윗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동탄-판교는 중산층에서 상위의 중산층이죠. 서울 안에서는 뉴타운, 서울 밖에서는 신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가 대부분 중산층의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살고 있습니다. 즉, 일정 정도의 수입 이상이 되지 못하면 자신들의 커뮤니티 안에 못 들어오는 부동산의 구조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들끼리는 강남이 제일 상위이고 어디가 그 밑이며, 어디가 그 밑이다하는 인식이 있고 항상 비교하기에 자기네들이 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네들 주변에는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 밖에 없고, 자신들의 비교대상은 항상 더 좋은 아파트 사람들이니 자신이 서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죠.
뉴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탄핵 집회 이후 광장 정치의 발달은 정치를 중산층들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들은 항상 서민이라고 생각하며, 부자 감세에는 저항하지만, 항상 부자라고 말하는 바운더리는 자신들의 위만을 이야기합니다. 민주 진영 자체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자본가와 노동자, 혹은 1%대 99%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10%:90%, 혹은 20%:80%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기발전을 할 수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 있지요.
이미 자본은 주식이라는 분점의 형식으로 공유되기에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분류보다는 노동자 중에 어떤 노동자층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사회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은 주식이 회사의 의결권과는 무관한 그냥 투자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치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회의 불균형입니다. 대학 진학은 부모님의 수입과 비례해서 거의 이루어지고, 또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의 윗단에 들어갈 확률은 대학 서열과 더불어 부모님의 수입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점차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기회의 불균형은 사회의 역동성을 줄인다는 측면에서도 고려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큰 의문이 있습니다!
기존의 민주 진영과 이재명 지지자의 차이는 잘은 모릅니다. 이재명 지지자 집단이 다만 뉴미디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집단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PC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곤 하지만, 그건 다른 계급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보자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내재한 보수성 때문입니다.
이재명 지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은 그 친구가 제 친구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말하다가, 이재명이 대선 가도에 올라타고 자신이 30대가 되자, 다른 계급의 이해관계는 잘 모르겠고 중산층들만의 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말하는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저만의 좌절감을 토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ㅎㅎ
말씀 중에 중산층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중산층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판교와 동탄을 꼽고 싶은데, 이런 환경에서 거주하고 직업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재명 진영을 지지하는 (민주진영 자체를 지지하는 것과는 결이 굉장히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만) 정서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어떻게 이재명이라는 아이콘이 그들을 잘 대변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호기심이 듭니다.
간혹 사회과학 하시는 분들 중에 "통념과 달리,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양극화는 완화되어 가고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분들이 제시하는 데이터를 뜯어보면 아마 동탄-판교 생활권을 누리는 신흥 중산층 집단이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강남 대치동 생활권을 누리는 전문직 집단과도 또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사과나무씨앗 사과나무씨앗님! ㅎㅎㅎ 긴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ㅎㅎㅎ
저는 어떠한 지지자나 유권자의 삶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렇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일견 동의를 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숨기고 있다거나,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분, 혹은 모순적이거나 위선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선악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비겁함과 비겁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이 나뉜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비겁함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비겁함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비겁함을 성찰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의 가치는 바꿀 생각이 없으나, 비겁함만큼은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겪어보지 않고 알 수 없는 많은 영역이 있지요.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유지하시려는 태도는 존중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저는 보다 현실적으로 인간들을 믿어보고자 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를 버렸으나 이내 후회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에는 상대가 나를 위해 하는 말인지 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인지 스스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감정이나 정치적 논리에 의해, 혹은 불안감에 의해 타인을 위해 말하는 사람을 버릴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버리지 못하고 못내 그리워하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더 믿는 것은 제 눈 앞의 인간들입니다. 2000여년간 내려온 예수님의 말씀도 중요하겠으나, 왜곡되었을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게 말씀하신 게 중요하게 강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눈앞의 인간들의 고충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고민들을 나누다 보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믿는 것들은 그러한 종류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최성욱님이 소개하신 시의 '문'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는 시인지라 계속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사과나무씨앗님의 해석 또한 귀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최성욱 @서형우 안녕하세요, 최성욱님, 서형우님! ☺ 최성욱님께서 소개하신 시의 '문'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론과 지식은 분명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론과 지식 그 자체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를 잘 아는 내가 아닌 남들이 만든 것이고, 게다가 다른 국가나 다른 환경이나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대에 살거나, 다른 성별의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배웠어도 현실에 적용하면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배웠으니 현실에 적용은 해볼 수 있습니다. 그때 아주 조심스럽게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자칫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 적용을 통해 배워서 자신에게 필요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노하우'가 타인들의 문제 해결에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 어려운 점이 이 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너무 넓고 다양한데, 한계가 있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이론과 지식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다 파악해서 현실에 적용하려니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물도 하느님이 아니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복잡한 세상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에도 큰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여러 정치인들이나 지지자나 유권자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의 삶을 제가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름 색다른 다양한 세상 경험들을 하고 보니 느낀 점입니다. 제가 모르는 세상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겪은 경험들은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 앞에 겸손하고 조심해야만 그나마 큰 잘못을 줄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생각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최성욱 아이고... 어떤 당나귀 귀가 성욱님을 괴롭히는지요?
@서형우 저도 혼자 말이 너무 많아지는 타입입니다. 지금은....좀 다른 버전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죠. 말로 못 떠드니 글로 떠들러 얼룩소에 옵니다. 속세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소리치고 싶은 날이 많으니.....
@최성욱 혼자 너무 말이 길어진 거 아닌가 싶습니다... ㅠㅠ 너무 제 생각만 이야기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서형우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최성욱 허탈감이나 불만이 차오르는 날이 있겠고,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는 날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앎을 실천하기가 힘겹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정치는 선악의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거기에서 비겁함과 비겁하지 않으려함의 영역 또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비겁하지 않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반상의 법도라 표현하신 부분, 그 부분을 저는 외부에서 나에게 가하는 압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압력을 모조리 수용하자 한다면, 전반기의 푸코가 이야기하였던 구성된 주체가 되어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가해지는 여러 압력들 중에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저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압력은 받아들이고 거짓된 것은 씻어내는 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후반기에 푸코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영성'이 많이 쇠퇴한 시기입니다. 종교는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극단적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구성되었다고 말하며 모든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생각할 것만을 권합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만 너무 익숙해지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교 밖에서 '영성'을 찾고 예술과 글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거짓된 압력을 거부하고, 참된 압력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고, 이를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도그마가 조금 덜한 형식으로 말입니다.
시구로 말씀하셨으니 시구로 답하겠습니다. 기형도는 거짓된 압력을 거부하고 참된 것들에 다가가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흔해빠진 독서라는 시에서 기형도는 휴일에 하루 종일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읽은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기형도는 상상합니다. 읽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고자 하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라고"
그렇기에 그 위대한 시인이 자신을 어필하기보다 오래된 서적에서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하고 읽어주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에게 남은 것은 허망함입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어쩌면 그의 20대까지의 삶이 저의 젊은 시절 대부분을 관통하는 정서와 맞닿아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짓됨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하기는 꺼려했기에 혼자 삭히고, 혼자 공허해하며, 어떤 말들을 해서 얻어낸 사람들을 질투하는... 이런 소회를 잘 녹여서 글로 정리해볼까 했는데... 요즘 시간이 도통 나지를 않는군요. 핑계일 수도 있겠죠.
기형도 시인은 30이 넘어가면서부터 어떤 말을 하고자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절해버렸죠 ㅠㅠ
어찌 되었건 최성욱님도 영성을 추구해보고 비겁해지지 않아보심이 어떨지 싶습니다. ㅎㅎㅎ 이론의 문을 다시 걸어나간 것은 기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형도는 이론의 문 안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을 거부할까봐 입을 다물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 그저 허탈감에 불만이 차오를 때 기운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한숨으로 넘어가는 날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니 정치나 선악도 일장춘몽의 꿈이고 그저 그 시대의 반상의 법도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또 어느날은 다 개소리야! 이런 생각도 들고 선, 악 불평등 공정함 다 부질없고 그저 불만은 차오르는데 장작이라는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텅빈 공허함 이런 것이 무수히 많은 공장과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마음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 책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글인데 어쩐지 기형도 시인이 떠오르더군요.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이야트에 나오는 시
나는 젊었을 때 열심히 학자와 성인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은 이론을 배웠네
그러나 언제나 되돌아 나왔네
내가 들어간 그 문으로
어찌보면 기형도의 그 시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과나무씨앗 사과나무씨앗님! ㅎㅎㅎ 긴 말씀 감사합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ㅎㅎㅎ
저는 어떠한 지지자나 유권자의 삶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렇기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일견 동의를 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숨기고 있다거나,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분, 혹은 모순적이거나 위선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선악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관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비겁함과 비겁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이 나뉜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비겁함을 선택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비겁함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비겁함을 성찰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의 가치는 바꿀 생각이 없으나, 비겁함만큼은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겪어보지 않고 알 수 없는 많은 영역이 있지요. 하느님 앞에서 겸손을 유지하시려는 태도는 존중합니다. ㅎㅎㅎ 그러나 저는 보다 현실적으로 인간들을 믿어보고자 합니다. 인간들은 예수를 버렸으나 이내 후회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인간의 내면에는 상대가 나를 위해 하는 말인지 저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인지 스스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감정이나 정치적 논리에 의해, 혹은 불안감에 의해 타인을 위해 말하는 사람을 버릴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버리지 못하고 못내 그리워하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더 믿는 것은 제 눈 앞의 인간들입니다. 2000여년간 내려온 예수님의 말씀도 중요하겠으나, 왜곡되었을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게 말씀하신 게 중요하게 강조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눈앞의 인간들의 고충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고민들을 나누다 보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믿는 것들은 그러한 종류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최성욱님이 소개하신 시의 '문'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는 시인지라 계속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사과나무씨앗님의 해석 또한 귀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최성욱 @서형우 안녕하세요, 최성욱님, 서형우님! ☺ 최성욱님께서 소개하신 시의 '문'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론과 지식은 분명 살아가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론과 지식 그 자체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나를 잘 아는 내가 아닌 남들이 만든 것이고, 게다가 다른 국가나 다른 환경이나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대에 살거나, 다른 성별의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배웠어도 현실에 적용하면 현실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배웠으니 현실에 적용은 해볼 수 있습니다. 그때 아주 조심스럽게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자칫 큰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 적용을 통해 배워서 자신에게 필요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노하우'가 타인들의 문제 해결에 영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 어려운 점이 이 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너무 넓고 다양한데, 한계가 있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이론과 지식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다 파악해서 현실에 적용하려니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물도 하느님이 아니고 완전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복잡한 세상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에도 큰 한계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여러 정치인들이나 지지자나 유권자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의 삶을 제가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름 색다른 다양한 세상 경험들을 하고 보니 느낀 점입니다. 제가 모르는 세상이 무궁무진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겪은 경험들은 새발의 피일 것입니다.
제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 앞에 겸손하고 조심해야만 그나마 큰 잘못을 줄이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생각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최성욱 허탈감이나 불만이 차오르는 날이 있겠고,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는 날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앎을 실천하기가 힘겹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 정치는 선악의 영역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거기에서 비겁함과 비겁하지 않으려함의 영역 또한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비겁하지 않기 힘들기 때문이지요.
반상의 법도라 표현하신 부분, 그 부분을 저는 외부에서 나에게 가하는 압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압력을 모조리 수용하자 한다면, 전반기의 푸코가 이야기하였던 구성된 주체가 되어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가해지는 여러 압력들 중에 어떤 것이 거짓된 것인지, 저에게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된 압력은 받아들이고 거짓된 것은 씻어내는 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후반기에 푸코가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영성'이 많이 쇠퇴한 시기입니다. 종교는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극단적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구성되었다고 말하며 모든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생각할 것만을 권합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만 너무 익숙해지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느낌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교 밖에서 '영성'을 찾고 예술과 글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거짓된 압력을 거부하고, 참된 압력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고, 이를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도그마가 조금 덜한 형식으로 말입니다.
시구로 말씀하셨으니 시구로 답하겠습니다. 기형도는 거짓된 압력을 거부하고 참된 것들에 다가가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흔해빠진 독서라는 시에서 기형도는 휴일에 하루 종일 책을 읽습니다. 그러나 읽은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기형도는 상상합니다. 읽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고자 하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라고"
그렇기에 그 위대한 시인이 자신을 어필하기보다 오래된 서적에서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발견하고 읽어주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에게 남은 것은 허망함입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어쩌면 그의 20대까지의 삶이 저의 젊은 시절 대부분을 관통하는 정서와 맞닿아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짓됨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고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에 대해 말하기는 꺼려했기에 혼자 삭히고, 혼자 공허해하며, 어떤 말들을 해서 얻어낸 사람들을 질투하는... 이런 소회를 잘 녹여서 글로 정리해볼까 했는데... 요즘 시간이 도통 나지를 않는군요. 핑계일 수도 있겠죠.
기형도 시인은 30이 넘어가면서부터 어떤 말을 하고자 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절해버렸죠 ㅠㅠ
어찌 되었건 최성욱님도 영성을 추구해보고 비겁해지지 않아보심이 어떨지 싶습니다. ㅎㅎㅎ 이론의 문을 다시 걸어나간 것은 기형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형도는 이론의 문 안에서 다른 이들이 자신을 거부할까봐 입을 다물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가 들고 몸과 마음이 지치면 그저 허탈감에 불만이 차오를 때 기운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한숨으로 넘어가는 날이 오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니 정치나 선악도 일장춘몽의 꿈이고 그저 그 시대의 반상의 법도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또 어느날은 다 개소리야! 이런 생각도 들고 선, 악 불평등 공정함 다 부질없고 그저 불만은 차오르는데 장작이라는 체력이 고갈되어 가는 텅빈 공허함 이런 것이 무수히 많은 공장과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마음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 책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글인데 어쩐지 기형도 시인이 떠오르더군요.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이야트에 나오는 시
나는 젊었을 때 열심히 학자와 성인을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은 이론을 배웠네
그러나 언제나 되돌아 나왔네
내가 들어간 그 문으로
어찌보면 기형도의 그 시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영진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제가 문제 의식을 갖는 부분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도 깊이 연관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계급이라는 것을 나누는 기준이란 상당히 애매하기 마련입니다만, 저에게 있어서는 지금 당장의 소득보다는 이 이중구조에서 윗단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아랫단에 속한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나눌 수 있게 된다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수출로 인한 경제성장을 염두에 두고 발전해왔습니다. 그래서 수출 대기업의 정규직, 그리고 이외에 전문직, 아니면 공무원, 교사와 같이 안정적인 직업 생활을 할 수 있는 부류가 있고, 내수에 종사하는 기업, 아니면 대기업에 납품하는 업체의 직원,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비정규직이 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출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혜택은 이중구조의 윗단에 속한 사람이 얻게 되며, 상당히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20년(요새는 이마저도 짧아지고 있지요...) 정도 누리면서 연봉이 점차 높아질 수 있다면,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도 존재하죠. 연봉이 계속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 회사도 언제까지 안정적으로 운영될지 미지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산층은 이러한 이중구조의 윗단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동탄-판교는 중산층에서 상위의 중산층이죠. 서울 안에서는 뉴타운, 서울 밖에서는 신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가 대부분 중산층의 바운더리에 속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게이티드 커뮤니티에 살고 있습니다. 즉, 일정 정도의 수입 이상이 되지 못하면 자신들의 커뮤니티 안에 못 들어오는 부동산의 구조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들끼리는 강남이 제일 상위이고 어디가 그 밑이며, 어디가 그 밑이다하는 인식이 있고 항상 비교하기에 자기네들이 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네들 주변에는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 밖에 없고, 자신들의 비교대상은 항상 더 좋은 아파트 사람들이니 자신이 서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죠.
뉴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탄핵 집회 이후 광장 정치의 발달은 정치를 중산층들의 전유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신들은 항상 서민이라고 생각하며, 부자 감세에는 저항하지만, 항상 부자라고 말하는 바운더리는 자신들의 위만을 이야기합니다. 민주 진영 자체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자본가와 노동자, 혹은 1%대 99%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10%:90%, 혹은 20%:80%일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기발전을 할 수 있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이 있지요.
이미 자본은 주식이라는 분점의 형식으로 공유되기에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분류보다는 노동자 중에 어떤 노동자층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사회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은 주식이 회사의 의결권과는 무관한 그냥 투자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수치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경제적 양극화가 완화되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회의 불균형입니다. 대학 진학은 부모님의 수입과 비례해서 거의 이루어지고, 또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의 윗단에 들어갈 확률은 대학 서열과 더불어 부모님의 수입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점차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기회의 불균형은 사회의 역동성을 줄인다는 측면에서도 고려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큰 의문이 있습니다!
기존의 민주 진영과 이재명 지지자의 차이는 잘은 모릅니다. 이재명 지지자 집단이 다만 뉴미디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집단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PC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곤 하지만, 그건 다른 계급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보자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내재한 보수성 때문입니다.
이재명 지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은 그 친구가 제 친구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말하다가, 이재명이 대선 가도에 올라타고 자신이 30대가 되자, 다른 계급의 이해관계는 잘 모르겠고 중산층들만의 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말하는 상황에 대해서 느끼는 저만의 좌절감을 토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ㅎㅎ
말씀 중에 중산층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중산층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판교와 동탄을 꼽고 싶은데, 이런 환경에서 거주하고 직업활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재명 진영을 지지하는 (민주진영 자체를 지지하는 것과는 결이 굉장히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만) 정서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어떻게 이재명이라는 아이콘이 그들을 잘 대변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 호기심이 듭니다.
간혹 사회과학 하시는 분들 중에 "통념과 달리, 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양극화는 완화되어 가고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분들이 제시하는 데이터를 뜯어보면 아마 동탄-판교 생활권을 누리는 신흥 중산층 집단이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강남 대치동 생활권을 누리는 전문직 집단과도 또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최성욱 아이고... 어떤 당나귀 귀가 성욱님을 괴롭히는지요?
@서형우 저도 혼자 말이 너무 많아지는 타입입니다. 지금은....좀 다른 버전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죠. 말로 못 떠드니 글로 떠들러 얼룩소에 옵니다. 속세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소리치고 싶은 날이 많으니.....
@최성욱 혼자 너무 말이 길어진 거 아닌가 싶습니다... ㅠㅠ 너무 제 생각만 이야기한 건 아닌가 싶어서요...
@서형우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